어리둥절 산부인과 입문
본격 워킹맘 생활기를 쓰기에 앞서 내 인생에서 가장 어이없는 일인 임신부터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고 싶다. 결혼을 준비하게 된 계기는 양가 어른들이 서둘러서도, 현 남편의 프로포즈도, 서른을 넘어선 나의 불안함이나 조바심도 아니었다.
다니던 직장에서 건강검진을 받던 날이었다. 초음파 검진실의 담당 의사가 여러차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무래도 산부인과 정밀 검진을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전문 병원에 꼭 가보시라고 강권했다. 아니 이게 무슨 드라마 대사같은 소리야. 이전까지 건강검진에서 이상소견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어리둥절과 반신반의와 겁이 뒤섞였다. 나쁜 상상을 하며 '드디어 올 게 왔나? 내가 너무 몸을 방치하고 살았나?' 불안하다가도 의사들은 사소한 것도 으레 큰 일난 것처럼 말하는 법이라고 태만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엎치락 뒤치락 하는 마음으로 주변에 조언을 구해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있다는 여성병원에 예약했다.
드디어 진료일, 그러니까 산부인과에 전격 데뷔한 날. 나는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문고리 잡은 채로 뒷걸음질 쳐서 나올 뻔 했다. 간호사가 눈도 안마주치고 홑껍데기 같은 치마를 주면서 다짜고짜 아랫도리를 팬티까지 다 벗고 갈아입으라더니 다리를 양쪽으로 벌리게 되어 있는, 전기의자처럼 생긴 진료의자에 누우라고 했다. 네?? (혹시 산부인과에 가보지 않은 독자가 계시다면 명심하셔라. 산부인과 진료실에 들어가면 자신도 모르게 반드시 "네???" 라고 되묻게 돼 있다.) 눕는 게 끝이 아니다. 엉덩이를 위로 더 올려라 내려라, 몸에 힘을 빼라, 주문이 이어지고 나는 아랫도리를 다 내놓고 주문대로 자세를 잡아야 된다.
산부인과 진료실이 이렇게 인격이 말살되는 곳인데 진료실 밖 인생선배들은 이걸 알고서도 태연한 얼굴로 있었던 것인지. 전기의자 스타일의 진료의자에 아랫도리를 내놓고 누워 있으니 밝고 긍정적인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고 사는 게 느와르 같았다. 세상에, 눈 앞에 사람이 그러고 있는데 의사는 태연하게 증상을 묻고, 대화를 이어갔고. 이리저리 뱃속 사진도 몇 장 찍고 밖에서 기다렸다가 결과를 들으러 다시 오라고 했다. 주섬주섬 옷을 추스리고 마음이 한껏 초라해졌다. 잠시 후에 진료실에 들어가선, 얼굴을 마주한 이 의사 양반이 아까 나를 전기의자에 눕혀놓고 아랫도리를 들쑤시며 진료하던 사람이라 생각하니 눈을 마주치기 어려웠다. 어디를 봐야할지 눈동자 자리도 못잡았는데 의사는 침착하고 태연하게 얄궂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진료결과 내 자궁에는 지름이 9센티 정도 되는, 매우 큰 편에 속하는 혹이 있고, 내가 부쩍 똥배가 나왔다고 생각하던 그것이 뱃살이 아니라 혹이었으며 지체할 겨를 없이 빠른 시일 내에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고말고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수술을 해야 하니까 수술 날짜부터 잡고 가라고 했다. 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 혼을 쏙 빼놓는 산부인과.
부랴부랴 회사에 휴가를 내고, 복강경 수술로 혹을 떼냈고 며칠 입원을 했다. 수술 후 회진을 돌던 의사가 자궁에 이렇게 큰 혹을 달고 다녔으면 어지간히 아프고 피로감도 컸을텐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는 말을 하자 그동안 생리통이 엄청났던 날들이 생각났고. 그 와중에도 배를 부여잡고 엉금엉금 기듯이 출근한 날들이 생각나서 눈물이 났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수술 후에도 얄궂은 소리는 이어졌다. 수술을 하다보니 자궁에 작은 종양이 더 있고, 양성종양이지만 위치가 좋지 않아서 정기검진을 통해 지켜봐야 한단다. 그리고 자궁의 벽이 얇고 어쩌고 저쩌고 아무튼 여러가지 난감한 이유로 나는 난임 또는 불임의 가능성이 매우 높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 몸에 붙어 있으나 있는 줄 모르고 살았던 자궁이라던가, 나팔관 같은 데 생애 최초로 신경이 쓰였다.
삼십대에 막 진입하던 시점, 남자친구와 결혼을 생각해보긴 했지만 임신과 출산이란 주제가 이렇게 깜빡이도 없이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결혼 전에 나는 내 한 몸 먹여살리기도 벅찬 세상에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종종했고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알레르기 반응도 있었다. 그렇지만 막상 영영 아이를 낳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원인모를 상실감이 느껴졌다. 젊어서였을까. 인생은 내가 개척하는 것이라 생각해왔지, 처음부터 기회가 없는 일이 있다는 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결혼도 전에 마디점프처럼 던져진 난임, 불임같은 단어에 어쩐지 BGM으로 혀차는 소리같은 게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봐 젊은이, 인생은 당신이 선택하는대로 움직이지 않지. 계획따위 소용없을 때가 많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