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도 에너지가 많이 드는데 아이의 소풍이나 체육대회, 체험학습 같은 이벤트가 생기면 마음이 한층 더 분주하다. 그냥 트랙을 따라 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서 죽겠는데 예고 없이 갑자기 장애물이 나타나 힘껏 점프를 해야 하는 기분이랄까.
그날은 유독 바쁜데 회식까지 있었다. 싱글들은 없는 핑계를 만들어서 회식에 빠질 수 있지만 워킹맘은 없는 핑계를 만들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질 일이 많기 때문에 없는 핑계까지 더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참석할 수 있을 때 최대한 참석해서 다음에 빠질 때를 대비한 면죄부를 쌓아둔다. 그리하여 회식에 참석했고 왜 그랬는지 술도 제법 마셨다. 어지러운 머리로 비틀비틀 집에 돌아오니 아이는 아빠와 잠들어 있다. 그리고 식탁 위에 놓여있는 한 떨기 가정통신문. 다음 날 아이의 유치원에서 포트럭 파티를 하니 홈메이드 간식을 한 찬합씩 만들어 보내란다.
두둥 가정통신문과 나 자신과의 대화. 잠시만요. 뭐라고요? 이게 내일이었다고요? 유치원은 왜 이렇게 홈메이드를 좋아하는 걸까. 대기업에서 위생적인 공정으로 나온 저 많은 과자를 두고 왜 자꾸 엄마를 시키는 걸까. 남편이란 자는 이걸 나 보라고 식탁 위에 고이 올려두고 처자고 있는 걸까. 아! 이런 일이 있으려고 종일 해야 할 일을 빠뜨린 것 같은 기분이었나 보다. 처음 보는 내용은 아니고, 분명히 가정통신문을 며칠 전에 읽었는데 잊고 있었던 거다.
취한 채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만들어 보낼 것이 뭐가 있나. 빵도 떨어졌고 사다 놓은 쿠키도 없다. 과일은 너무 무성의해 보이고 치킨 너겟은 따뜻해야 맛있는데, 내일 아침에 만들자면 전쟁통이겠지. 지금 해놔야 한다. 대추가 보인다. 하...... 대추. 제사상이 자동 연상되는 대추로 어린이 간식을 만들어내야 한다. 옳지, 우리 집엔 쌀이 있지. 약밥을 만들자.
유치원 포트럭 파티에 약밥이라니. 어쩐지 어르신 스타일이지만 괜찮아, 유서 깊은 집안 같잖아. 갓 쓰고 도포 입고 세 줄씩 서서 제사 지낼 것 같은 느낌. 밥을 넣고, 흑설탕을 풀고 대추를 썰어 넣고, 보자 보자 크랜베리도 있다. 크랜베리를 사 둔 지난날의 나여, 잘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취중에 압력밥솥에 약밥을 올린다. 모두가 잠든 집에 취취취취 압력밥솥은 돌아가고. 압력밥솥의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식탁 위 조명을 켜고 앉으니 마치 핀 조명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이 시간에 약밥을 만드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홀로 외로이 약밥을 만드는 나를 먼 훗날의 또 다른 내가 시공간을 초월해 와서 가련하게, 한편으로는 귀엽게 보는 것만 같다.
시간은 새벽 2시. 밥이 됐다고 끝이 아니다. 동글동글 한 입 크기로 예쁘게 빚어서, 대추꽃도 만들어 올리고 나무 도시락에 한 찬합 포장한다. 이렇게 급하게 만들 때일수록 포장에 신경을 써야 한다. 왜냐! 나는 절대로 전날 밤 냉장고에 대추를 발견해서 취중에 만든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일주일 전부터 약밥을 향해 달려온 엄마, 내 아이의 포트럭 파티를 위해 혼을 갈아 넣은 엄마처럼 보여야 하니까. 기어이 약밥을 다 만들어 포장해 두고 세수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웠다. 이렇게 살다 간 내 얼굴도 말린 대추처럼 되겠지. 훗날의 나여, 이런 날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