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입사한 지 2주 하고 이틀이 지났다. 나는 그럭저럭 적응해 나갔다. 여전히 매일 새벽 다섯 시 삼십 분에 기상하는 것은 적응되지 않았지만……. 새벽 아침이면 베개에 눌린 머리를 허우적 묶고, 아침밥을 대신할 멀티비타민 한 알을 입에 털어놓고, 냉장고에 미리 넣어둔 두유를 냉큼 하나 챙겨 가방에 넣고 아빠와 차를 타고 집을 나왔다.
거칠고 빠르게 운전하는 아빠 운전대에 새벽아침에 내 심장은 차 밖을 뛰쳐나갈 듯이 뛰어댔다. 한 번은 아빠의 과격한 운전에 심장마비로 딸이 사망했다고 뉴스 뜨지 않을까 라는 잠깐 뉴스장면이 스쳐가기도 했다. 빨간불의 무서움이 없는 아빠는 모든 신호는 차가 없으면 싹 무시했다.
그 틈에 나는 "아빠 신호!" "아빠 멈춰!" "천천히 가도 돼!" 이 세 문장들로만 외치며 10분간 차를 타면서 내 입과 심장박동은 바삐 움직였다. 우리는 이런 전쟁 같은 출근 장면에서도 첫차를 탈 수 있는 맨 첫 번째 정류장으로 갔다. 우리가 처음부터 이렇게 험한 운전대를 잡고 첫 번째 정류장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매일 새벽아침 나는 집 앞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는데, 버스를 타러 나설 때마다 눈이 오거나 비가 왔고, 어떤 날은 손이 시려 잘려나갈 정도로 바람이 불었더랬다. 이렇게 고생 고생 개고생 끝에 버스를 타면, 앉아서 갈 수 있는 확률은 0.00001% 아니면 로또였다.
왜이런가 하니, 이미 내가 타는 정류장 보다 앞에서 만석으로 인천러 좀비들을 실었기 때문이었다. 피곤한 마당에 꼬꾸라져 서서 두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이 악몽을 몇 번이나 겪은 후에야 나는 '버스에서 앉아서 가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먼저, 우리 집 정류장 보다 한 정거장 전에서 탔다. 0.00001% 보다는 높은 확률이었지만 이마저도 못 앉고 출근하는 날이 있었다. 이에 적잖이 충격과 짜증에 휩싸인 나는 냅다 첫 번째 정류장을 향하였다. 첫 번째 정류장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 같은 길치가 내비게이션이라고는 믿지도 않고 보지도 않은 아빠를 설득해 직진, 우회전, 좌회전을 명령해 가며 10분을 달려 수많은 아파트들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첫 번째 정류장을 발견하는 것은 네이버에서 위성 지도로 편의점 간판을 발견하는 일 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류장을 발견한 뒤로부터는 나는 줄곧 첫 번째 정류장에서 나의 출근을 시작해 왔다.
"아빠, 다녀올게!"
"어. 잘 다녀와!"
우리 두 부녀는 이 한마디로 짧은 인사를 하고 떠난다. 나는 떠나기 전 가방에서 미리 챙겨두었던 두유를 하나 꺼내 아빠가 앉은 운전대 옆 동전 통 옆을 비집고 껴둔다. 새벽 아침부터 배고플 아빠에게 고맙다는 나의 무던한 표현이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한다. 아빠는 지은이가 차에서 내리고 나면 두유에 꽂혀있는 빨대를 이로 포장지를 베껴 콕하고 찍어 마시며 아침을 해결했다.
오늘도 나는 앞에서 맨 앞 남자 옆에 앉았다. 뒷 좌석들보다 여유가 있기도 하고, 이 남자는 나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아 자리도 딱 일인석에 맞게 앉아 좋았다. 이 남자도 나와 같은 생각인걸 까 아니면 나랑 앉기 싫어할까 이런 질문이 내 머릿속을 감돌기도 할 때 가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같은 생각이겠지 뭐 하고 눈을 감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 남자랑 출근한 지도 어언 3주가 넘었다. 그럼에도 가끔 타이밍이 안 맞으면 앞자리가 없어 내가 뒤로 밀려나거나, 아니면 어떤 냄새나는 아저씨 옆에 재수 없게 앉아 하루종일 마스크 안에 숨 막히는 심호흡을 하면서 기절한 체 간 적도 있었다. 제일 최악인 것은 자리가 없어 서서 가는 좀비들이 팔걸이에 있는 내 어깨에 엉덩이를 문대고 눌러앉아 서는 것이다. 이 서서 가는 좀비들은 앉을 곳이 없는 불쌍한 좀비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공공연히 자신의 불쌍함을 어필하듯 불편함 또한 제멋대로 표출한다.
이런 경우에는 나의 어깨빵이 아니면 내 팔꿈치가 서서 가는 좀비들의 엉덩이 방석이 되곤 한다. 내가 서서 간다면 남의 팔에 내 엉덩이를 대는 건 끔찍한데, 이 좀비들은 좀처럼 개의치 않아 한다. 아마도 꺼림칙한 것보다 두 다리로 서서 가는 것이 더 싫었던 걸까. 그래도 나는 내 엉덩이를 모르는 이에 내어주진 않을 테다.
오늘은 다행히 맨 앞 남자와 앉아 편히 출근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라는 마음을 내 마음의 감사일기에 새기며 잠들었다.
"이번 역은 삼성역, 한국무역협회입니다. This station is Samsung Samsung……"
나의 도착지를 알리는 버스 알림 멘션에 잠이 깨 추위에 더욱 움츠려진 나의 몸을 더 꽉 움츠렸다. 바람이 새어 들어오지 않게 안전무장 아니, 완전무장을 한 체로 버스에 서있는 좀비들 틈에 껴 내렸다.
"으-! 추워!"
발 톱까지 아려오는 추위에 나는 내 몸을 더 구겨 패딩 안으로 넣으려고 애썼다.
버스에 내리니 눈앞에 별다방 커피가 보인다.
오늘도 나와 같은 빌딩을 향하는 아저씨와 같이 출근을 할 것인가 아니면 깔끔하게 체면 따윈 포기하고 별다방을 갈 것인가. 모르는 사람 앞의 체면보다는 본능이 앞섰던 걸 까. 우리 오피스 아래아래층에서 근무하는 출퇴근 동지를 버리고 나는 별다방으로 출근할 셈이었다.
별다방은 아침 일곱 시부터 커피 향으로 좀비들을 유혹한다. 별다방은 특유의 유니크한 어트랙션으로 좀비들을 유혹하는데, 추운 겨울 아침 별다방 내부만큼은 따뜻해 보이는 브라운 빛 연출과, 커피 손님이 없어도 계속해서 바리스타가 드립커피를 내리는 듯 한 향이 좀비들을 길 가다 멈추게 한다. 나 또한 유혹당하는 좀비 중에 하나인데, 별다방 앞에서 추워 죽겠는 이 얼음판에 3분 같은 30초를 허비하며 고민이 시작되고는 한다.
하나 사면 사천오백 원,
점심 먹으면 만오천 원,
간식 먹으면 사천 원,
내가 타고 온 버스비 이천팔백 원, 왕복이니까 오천팔백 원.
씨발 숨만 쉬어도 삼만 원은 쓴다.
눈 딱 감고 오늘만, 별바당 커피를 마셔보기로 다짐한다.
이건 오늘 나를 위한 수혈이다. 이걸 못 마시면 나는 일을 절대 못 할 것이다. 나는 이걸 못 마시면 졸다가 망신당할 것이다. 나는 이걸 못 마시면 좆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해타산적인 사람으로 몇 가지 고민해 보니 별다방 커피를 사는 게 안 사는 것보다 몇 백배는 이득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별다방에 들어가 계획에도 없던 사이즈업을 해 그란데 사이즈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출근길을 이어갔다.
오늘따라 별다방 커피가 쓰디쓰게 느껴져 괜히 샀나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애써 나의 선택이 옳았다며 고개를 흔들고 정신을 차려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오늘도 역시 나 말고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이 것이 자율시간 출퇴근제의 낙이지.
나는 갓생 살기를 실천하는 유튜버처럼 한 껏 나의 아침에 취해본다.
해가 뜨는 서울 하늘을 바라보고 감성샷을 찍거나, 내 책상 쓰레기들을 정리하며 물티슈로 한번 삭 키보드를 닦아낸다. 나의 위생은 소중하니까. 그리고는 선자 씨가 있는 단톡방에 업무 알림을 시작한다. 선자 씨는 왜 인지 모르겠지만 모든 단톡방에 있다. 물론, 여자방만 빼고(직원들 방). 대행사와 커뮤니케이션하는 방, 마케팅 방, 파트너사와 커뮤니케이션하는 방까지 모든 방에 종속되어 있다. 왜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선자 씨는 방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는 선자 씨에게 보여주기 식 출근 알림 겸, 대행사에게 요청할 것들을 미리 정리해서 톡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출근하시면 OO님, 행사 배너로 변경 부탁드립니다."
"OO님, 출근하시면 솔드아웃 된 재고 탑업해주세요."
"OO님, 재고 탑업하면서 다른 재고들도 같이 탑업해주세요."
'그래…… 이렇게라도 일을 티내면서 해야하는거 맞겠지?' 두둑 탁탁 키보드를 치며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