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님께
제주도는 잘 다녀오셨나요? 모처럼 천천히 흐르는 제주를 마음껏 만끽하고 오셨기를 바랍니다.
요즘 제법 날이 따뜻해지고 자주 들르는 뒷산에는 제법 많은 생명들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더라고요. 각자 저마다의 모습으로 또 다른 계절을 맞이하느라 바빠 보였어요.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은 어느새 녹고 내린 봄비에 촉촉하게 젖어 산에 사는 모든 삶에게 터전이 되어 주고 있었어요. 그 덕에 나무들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또 꽃이 되기 위해 몽우리들이 몽실몽실 가지에 매달려 있었어요. 갈 때마다 그 모습이 조금씩 달라져 있는데 아마도 이제 곧 정말 꽃이 될 건가 봐요! 매번 조금씩 변화한 모습을 관찰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답니다. 뒷산을 올랐다가 내려오는 이 일이 제게는 삶의 활력을 줘요. 살아 숨 쉬는 듯한 산의 구석구석 생명의 현장을 탐험하면서 저 또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만 같죠. 그래서 요즘에는 더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기도 해요.
아마, 제주의 밤도 그러했을 것만 같네요. 작은 뒷산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이 있잖아요.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을 맡겨 결국에는 또 그 흐름에 적응해 내고야 마는. 메리 님이 보냈던 제주의 시간 동안 어쩌면 짧지만 잠깐 동안 그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셨던 걸지도요. 도시에서 굳었던 몸과 마음을 폭 안아주었기를 바라봅니다.
저도 사실은 제주를 참 좋아합니다. 아마도 메리 님이 만난 그 어떤 지점을 저도 느껴서 일 겁니다. 제주는 제게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디를 향해야만 한다거나 무언가를 꼭 해야만 한다거나 혹은 무언가를 탐해야 한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제주의 바람을 만끽해 보라고,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현재에 두어보라고 하는 것만 같았어요. 삶이 아닌 죽음을 향하고 있을 때 선택한 휴직 때 제주를 향했던 게 제게는 정말 귀중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두 달간의 짧은 제주 생활이었지만 지금의 저를 있게 하고 살게 하는 중요한 인생의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런 제주를 제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제주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또 해야 할 말이 많기에 이만 줄이겠습니다.
아파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때에 비해 지금은 꽤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지금은 다시 조금씩 운동도 하고 있고 뒷산도 오르고 조금씩 팔 굽혀 펴기도 하고 있답니다. 요즘에는, 아니 이렇게 된 지는 꽤 되었습니다만, 운동을 하지 않으면 어딘가 고장이라도 난 듯 몸 이곳저곳이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마치 기름칠을 하지 않아 삐걱대듯 온몸이 뻐근하고 무거워요. 소화도 잘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젠 정말 운동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가 되어 버린 겁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예전, 그러니까 이십 대 때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았고 먹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도 배가 다시 고파져 계속 무언갈 먹어대었습니다. 거기다 술도 자주 마시는 탓에 늘 숙취를 달고 살았어요. 술이 잘 받지 않는 체질임에도(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친구들과 잘 지내보고 싶어 술자리가 있으면 자주 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술자리에 불러주는 친구도 없거니와 설령 그런 자리가 있더라도 때로는 두렵기도 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가끔 즐기는 음주도 이제는 조심하게 됩니다. 더욱이 최근 아프게 된 이후로는 전혀 술을 입에도 대고 있지 않지요. 뭐, 결과적으로는 술을 먹지 않으니 정신이 맑아서 좋긴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된 연유로 운동에 대한 필요성을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니 필수성(?)이라고 해야 하려나요. 이제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요즘은 이전과는 다르게 팔 굽혀 펴기를 조금씩 섞어하고 있는데요. 이는 사실 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장치이기도 합니다. 정직한 운동이잖아요. 아무것도 하기 싫지만 일단 자세를 잡고 팔을 굽혔다가 다시 펴는 행위를 1회라도 하고 나면 그래도 무언가를 했다는 감각이 꽤 도움이 되더군요. 또 1회만 하게 되지는 않으니 일단 시작하면 힘이 닿는 데 까기는 하게 됩니다. 이 작은 감각이 하루를 활기차게 지내는 데 큰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일종의 ‘삶 유지 장치’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뭐, 저는 요즘 이렇게 살기 위해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 정진해 보겠습니다.
음, 다음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메리 님에게 있어 중요한 주제가 되겠군요. 바로 이 완벽주의에 관한 것.
저는 도통 이 완벽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메리 님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어떤 심오한 영역’이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는 됩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완벽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도, 그 누구에게도 상처받고 싶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배려하는 태도를 유지합니다. 저는 제가 받고 싶은 호의, 배려를 모두에게 베풀 뿐입니다. 저를 존중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아끼고 싶고 대우해주고 싶기 때문에 그만큼 주변 사람들을 그러한 태도로 대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모습이 완벽주의에 갇힌 모습으로 비칠 수는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제게 유의미한 성과라고 할 수 있겠지요.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더욱 배려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절대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허점이 없지도 않습니다. 다만 허점을 잘 숨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온통 부족하고 부끄러운 모습투성이기 때문에 이것을 잘 꺼내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다고 저의 허점 뒤에 숨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무기 삼아 자신을 보호받으려 한다거나 상대를 공격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이 허점들을 스스로 잘 인지하고 있기에 이를 잘 감출뿐입니다. 대신 잘하는, 비교적 내가 잘 꺼내놓을 수 있는 것들을 먼저 일선에 내놓고 잘 포장하는 것이지요. 이것 또한 상대를 위한 배려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동시에 나 자신을 위한 배려라고도 할 수 있겠어요. 그렇기에 그 모습이 신중해 보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뭐, 사실 신중한 성향이기는 하지만요.
결론적으로 저는 완벽주의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저는 완벽을 훨훨 저 멀리 날려 보내주었습니다. 완벽을 생각하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와요. 아마 이것 또한 완벽주의가 아니라는 증거 아닐까요? 아, 이 답장만 해도 미루고 미루다가 약속 시간인 자정을 훌쩍 넘겨 새벽에 보내는 것만 봐도….
메리 님, 저는 요즘 제법 평온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팀원들과 일주일에 한 번 감정 교류회를 하는데요. 일주일간 느꼈던 감정들을 서로 나누는 시간입니다. 이번에 저는 ‘편안하다’라는 감정을 골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정말 그랬거든요. 아무 걱정 없이, 더 현재에 만족하면서 지냈어요. 더 바랄 것도 없다. 오히려 가진 것이 더 소중해지고 곁의 사람들에게 더 감사한 나날들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씻고 예쁜 옷을 골라 입고 맛있는 걸 먹고 함께 차를 마시며 감정 교류회를 하는 지금, 이 순간이 참 아름다웠어요. 오롯이 순간을 만끽했어요. 제게 주어진 이 하루가 이제 곧 흘러가 내일에 다다르겠지만, 또 내일이 오늘이 되겠지만, 저는 그저 몸과 마음이 머무르는 지금이 참 좋았어요. 이토록 평안한 오늘에 함께한 그들에게 다시금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또, 저는 요즘 참 부끄럽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살아오는 동안 저는 참 많이도 부끄러워했습니다. 어릴 적에는 그것이 그저 소극적이라 그런 줄만 알았습니다. 어디 나서기를 싫어하고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내지 못했었지요.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는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소극적이라 그런 것과는 달랐습니다. 이것은 한 인간으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 같은, 살아가기 위해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한, 아주 중요한 일이었지요.
이와 같은 부끄러움을 갖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몰라서 그렇다고 줄곧 자기 합리화를 하며 이십 대를 지나고 보니 어느덧 삼십의 중반에 와있습니다. 어릴 때는 얼른 서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럼 어른이 될 줄 알았거든요. 뭐, 어른이 아니더라도 그것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구두를 신고 깔끔한 옷을 입고서 직장엘 다니고 행복한 가정을 이룬 멀끔한 사내가 될 줄 알았죠. 그러나 그것은 그저 꿈일 뿐이었습니다. 지금은 그저 남루한 마음을 가진 어른 흉내를 내야만 하는 서른 중반의 어린이가 되었습니다. 몰라서 그러면 안 되는, 꼭 알아야만 하는 것 투성이인 그런 때. 이제는 그 어떤 핑계가 통하지 않는 그런 나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과연 잘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누가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평생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끝끝내 이 부끄러움에 대해 시원하고 명확하게 답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부끄러움으로 저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부끄러움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얼마든지,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부끄러울 수 있다면, 부끄럽지 않기 위해.
오늘도 애쓰셨을 메리 님, 그럼 또 다음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3월 18일.
두루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