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우중도시에 대한 회한 17
여행이란 건 익숙한 일상을 떠나오는 것이라 아무리 1안, 2안, 3안까지 준비하여 철저히 대비하여도 여행 현장에서 돌발변수는 언제나 발생하고, 늘 준비한 예상 범위를 넘어서게 마련이다. 염개미는 길치여서 그런지 혹은 삶을 융통성 없이 경직된 채 살아와서 창의성이 부족하여 그런지 그런 돌발변수에 매우 취약하다. 예상치 못한 그와 같은 돌발상황이 이 번에는 비드고시치(BYDGOSZCZ) 행 기차 안에서 발생하였다. 기차 내 좌석이 내가 예약한 형태가 아니었던 것. 두 좌석 순 방향으로 예약을 하였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네 명이 마주 보는 좌석에 방향도 역 방향이었다. 그 때는 몰랐지만, 나는 모든 기차 티켓을 정확히 한 달 전 예매해 두었기 때문에, 그 이후 변동이 생겨도 좌석이나 칸을 바꿔줄 수 없어서 그렇게 되었던 듯 하다. 이 후 비드고시치에서 토룬 갈 때, 그리고 토룬에서 그단스크 갈 때, 우리 좌석번호가 아예 통째로 없었던 적이 있어서, 엄청 당황하여 차장언니에게 물으니 칸(호차) 전체가 고장이 나서 교체해서 그렇다고. 그러니까 전체 기차 중 그 칸만 갈아끼운 것인데, 좌석 전체가 내가 제일 싫어하는 해리 포터 좌석 즉, 서로 마주보고 앉는 형태의 좌석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엄청 황당하였던 기억이다.
좌석 형태도 좌석 형태고,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좌석에 웬 남자가 두 좌석을 다 차지하고서 연짱이 자리까지 다리를 쭉 뻗고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하지만 연짱이는 그런 상황 쯤에 굴하지 않는 아이여서 제 다리 뻗을 공간까지 차지한 남자의 다리를 조용히 발로 밀고 앉았다. 아저씨, 다리 길이는 나도 지지 않아요, 나지막히 말하고 앉는 연짱이였다.
기차가 각 역에 정차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탑승하여 원 좌석을 찾아 앉자, 옆 열에 앉아 있던 언니가 마주보고 앉은 우리 앞 좌석 코 골며 자는 남자의 옆 자리로 왔다. 그가 언니 자리를 차지하고 자는 통에 옆 열에 앉아 있다가 좌석 주인이 오자 할 수 없이 원래 자기 자리로 돌아온 것. 언니는 기차 최종 목적지 그디니아 아닌 그단스크까지 간다고 하였다. 나와 연짱이에게 폴란드 어디 어디 다녀왔느냐 물어서 우치, 크라쿠프, 포즈난에 이어 비드고시치에 간다고 대답해주었다. 외국인인 내게 포즈난은 많이 우울한 도시였다고 하자, 언니는 다른 도시들과 포즈난은 매우 다르다고. 독일 령이었던 곳이라 사는 사람들도 분위기도 여타 폴란드 도시들과 매우 다른 곳이 포즈난이라고 내게 말해주었는데, 그렇게 따지면 아예 '단찌히' 라는 독일어 이름이 있는 그단스크나 폴란드 내 많은 도시들 역시 그러하지 않나. 포즈난이 음울해 보이는 이유가 과거 독일 령이어서 그렇다는 대답은 현재 포즈난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을 것 같은데. 어쨌든 같은 폴란드 사람들도 포즈난을 음울하다고 생각하는구나, 싶기는 하였다.
언니가 비드고시치 이후 어딜 가느냐 물어서 토룬에 간다고 하였더니 외국인이 --그것도 아시안이 -- 어떻게 토룬을 아느냐는 반응이었다. 토룬은 중세도시로 유명하여 론리에도 나오지만, 특별한 볼거리 없고 알려지지도 않은 비드고시치를 어찌 알고 가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니예요? 우리나라 시인 중 한 분이 쓴 시에 토룬이 나와서 그 정서를 찾아간다고 하였더니 언니는 진심으로 놀랐다. 왜 안 그렇겠나. 바르샤바도 크라쿠프도 아닌 작은 도시 토룬이 옆 나라 독일이나 같은 유럽 국가도 아닌 잘 알지도 못하는 먼 아시아의 어떤 나라 시인의 시에 나온다니. 얘기를 나눌수록 언니는 역사의식도 있고 생각도 바른 참 좋은 사람이었다. 폴란드 어가 어렵지, 하면서 이런 저런 발음 때문에도 더 어려워, 하고 설명해주는데, 나는 정말이지 흉내도 낼 수 없는 먼먼 고대 독일어 후두음 같은 발음이 언니 입에서 후두두, 쏟아져나왔다. 너네 폴란드 사람들은 자유롭고 역사의식 짱짱하고 긍정적인데다 부지런하고 애국심도 깊어서 폴란드 미래는 내가 느끼기에 밝아보여, 하였더니 언니가 활짝 웃었다. 우리나라와 역사로나 국민성으로나 동질감이 느껴져서 폴란드를 좋아한다고, 너네 나라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마음을 다해 말해주었다.
언니와 토룬에 대해 얘기하려는데,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남자가 홀연히 깨어 참견을 하였다. 토룬은 실제 코페르니쿠스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뭐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고, 코페르니쿠스가 죽어 묻힌 곳은 프롬복(PROMBOK)이 맞지만, 워낙 오래 전이라 묻힌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고. 코페르니쿠스는 원래 사제였다고 알고 있었냐고 물었다. 네, 알고 있었지요. 자다 깬 남자는 몇 년 전에 어딜 다녀왔는데 엉망이었고, 이 십 년 전 어느 곳의 버스터미널은 가관이었다는 둥 정말 많은 말을 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프롬복 가는 교통편에 대해서는 말해줄 것이 없었다. 그냥 쭉 주무실 일이지.
도착한 비드고시치 중앙역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숙소 창문 밖에서는 밤 새 비와 눈 섞인 비가 번갈아 내렸다. 이 번 여행은 맑은 날은 손꼽을 정도여서 비바람 혹은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 우기 유럽의 정수를 아주 제대로 보고 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구시가 돌바닥을 걷다보면, 흐린 날 특유의 음울함이 어쩌면 유럽의 정취를 더해주는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하여 나는 한겨울 유럽 여행도 싫지 않았다. 비수기 공사만 좀 안 하면 참 좋을 것을.
비드고시치는 우리에게 완벽한 '우중도시(THE RAINING CITY)' 였다. 굳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비드고시치 체류 내내 정말이지 잠시도 쉬지 않고 비와 눈이 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비는 나와 연짱이에게 많은 고난을 주었다.
아직 날이 덜 밝아서 푸른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 일곱 시. 우리가 아침밥을 먹는 동안 창 밖으로는 사위의 소음을 삼키며 사그락 사그락, 눈 내리는 풍경이 이어졌다. 바닥에 떨어지면 녹지만 나무 위에 내리면 쌓였다가 섬세한 결정이 금세 뭉그러지는 물기 많은 눈이었다. 집에서라면 반가운 눈이라며 현관문 밖으로 나가 한참 눈구경을 하였겠지만, 여행객에게 눈과 비, 그리고 추운 날씨는 걱정거리일 뿐이라. 바람까지 세게 불어서, 구시가 행은 물론 숙소에서 기차역까지 눈보라를 뚫고 갈 생각을 하니 자연스레 걱정이 앞섰다. 얼른 아침밥을 먹고 들어와 빨리 숙소를 나설 차비를 하는데, 연짱이가 알려주었다. 숙소 동네 간이역을 지나는 지역선은 아침 여덟 시 조금 넘은 시간에 이미 지나갔고, 다음 기차는 아홉 시 조금 넘어 지나간다고. 한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 지역선이어서, 시간을 칼같이 맞추지 못하면 탈 수 없을 뿐 더러 다음 지역선 지날 때까지 꼬박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서두르라고. 아침밥 먹으면서 사진도 찍고 창 밖도 내다보고 해찰을 하는 바람에 여덟 시 시간대 지역선은 보냈지만, 아홉 시 즈음 지나는 지역선은 연짱이 말대로 꼭 타야 해서 엄청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기차역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사실 역으로 뛰어갈 때서부터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말이 쉽지 바람 거세게 부는 겨울날 눈보라 속을 뛰어 간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어서 제 시간에 간이역에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을. 더구나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녹는 물기 많은 눈은 머리, 얼굴, 겉옷 뿐 아니라 신발까지 엉망으로 만들었고, 기차역까지 이어진 길은 사방이 작은 물웅덩이였다. 그렇게 힘들게 뛰어갔지만, 연짱이와 나는 육교 앞에서 아홉 시 지역선이 지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미리 짐작하여 알고는 있었어도 참담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때는 이 역이 아무 것도 없는 간이역이라는 것을 몰랐던 터라 역 주변에 당연히 역사(STATION BUILDING)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티켓부터 구매하려고 열심히 주변을 탐색하였지만, 그런 게 있을 리가. 역에 딱 붙어 있는 건물이 당연히 역사일 것이라 믿고 역무원이 게을러서 아직 출근 전인가 싶어 살펴보았지만, 결국 누군가의 개인소유 가옥이라는 결론 뿐이었다. 너무 황당하고 황망하여 미친듯이 역사를 찾을 때는 내 뒤에 연짱이가 없는 줄도 몰랐는데, 역사가 없는 것을 깨닫고 정신이 드니 연짱이가 없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가림막이나 덮개도 없는 육교 위 계단 한 켠에서 비 같은 눈을 그대로 맞으며 풀 죽어 서 있었다.
"엄마, 내가 미리 안 알아보고 서둘러서 미안해."
자책을 하고 있는 아이를 보자 마음이 아팠다.
"네가 미안할 일은 아니야. 날씨 때문에 뛰어도 제 시간에 못 댈 거라는 말을 네게 안 한 엄마 탓도 있어. 그리고 간이역에는 티켓을 구입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는 건 엄마도 몰랐으니 이게 어떻게 네 탓이겠어. 어린이, 어제 네가 왕복 티켓 구매한다면서 편도만 4인분 끊었을 때도 그렇고, 포즈난 말타호수에서 고집 부렸을 때도 그렇고, 오늘도 엄마는 안 될 줄 알았지만 말리지 않았어. 왜 그랬을 것 같아?"
"왜?"
"엄마가 연짱이와 언제까지 함께 여행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언젠가는 엄마 말고 너는 네 남편, 네 애기와 여행할 것이고, 물론 그 때는 네 남편이 함께 하겠지만, 남편이 함께 할 때든 아니든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수습하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지금 수습 가능한 선에서는 네 결정대로 하도록 두는거야. 돌이킬 수 있는 실수나 오류는 좋은 경험이기도 하고. 또 실수나 오류를 통해 무언가를 정정하고 경험하면서 조금씩 생각이나 폄이 넓어지는 게 꼭 여행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니까. 너도 알다시피 엄마도 실수 엄청 많이 하잖아. 길도 못 찾으면서 막 고집 부리고 그래서 너 엄청 고생시키기도 하고. 연짱이 네가 있어서 여행도 이만큼 할 수 있는거야. 엄마는 네 나이 때 너만큼 용감하지도 시야가 넓지도 못했다고. 넌 잘 하고 있어."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 몇 번의 여행이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 째 바꿔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여행은 익숙한 일상을 떠나 낯선 풍경과 접해본 적 없는 시스템 속에 들어서는 일이기 때문에, 익숙한 일상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 긴장을 매 순간 하게 된다. 긴장과 함께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환경이 새로운 자극이 되고, 그것이 반복되면 낯익은 일상과 더 낯익은 내 모습을 다르게 느끼고 생각할 여지를 주기도 한다. 낯선 자극과 긴장감이 나와 내 일상을 거리두게 하고 낯설게 해주는 것이다. 연짱이도 염개미도 그 세월이 십 오 년이었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는 별나고 극성맞은 엄마를 둔 탓에, 에어컨도 없는 로컬버스에 혹은 개조 트럭에 실려 포장 깨진, 혹은 그보다 열악한 열 두 구비 구부러진 비포장길을 지극히 아이다운 투정 외에는 별 다른 불평 없이 매 번 동행하여 주었고, 걸어서 국경도 넘어다녔다.
아이가 어려서는 엄마가 일방적으로 여행계획을 세웠으나, 아이가 커가면서 여행 전 함께 여행 동선을 고민하고, 여행할 곳에 대한 서적을 골라 읽었다. 여행계획안은 아이가 원하는 것을 반영하느라 1안, 2안, 3안 늘어났다. 해당 여행지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어디로 갈 것인지, 무엇 때문에 그곳에 가려고 하는지, 서로 절충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해당 국가와 도시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대비하여 떠났어도, 길이 엇갈리거나 예상치 못했던 변수를 만나는 바람에 놀라 눈물을 삼켰던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언제나 좋은 날만 있을 수는 없어서 의견이 맞지 않아 간혹 투닥거리는 일도 있었으나, 성품 좋은 아이는 좀 더 길게 산 엄마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하여주었다. 특히, 돌발적으로 발생한 급박한 상황에서는 이유를 따져 묻는 것보다 무조건적인 신뢰가 필수라는 것을 직접 체득하면서 믿음이나 결속력도 더 단단해졌다. 또한 아이 뿐 아니라 엄마도 일상에서는 어쩌면 힘들었을, 이미 지나간 것이나 내 손을 떠난 것은 깨끗하게 잊거나 포기하는 법, 그러니까 현재에 집중하는 법을 익히게 되었고, 아이는 아이대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씩 깨달아갔다.
이미 누군가가 짜놓은 방향이나 동선을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여 움직이고, 그러다 진땀도 빼고, 스스로 계획하였으니 잘못되어도 스스로 책임져야 했으며,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어도 내 맘처럼 계획대로 되지 않는것이 많구나, 속상해하거나 의연해지기도 하였다. 결국 아이도 엄마도 길찾기라는 게 비단 여행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어렴풋한 깨달음이 하나 둘 쌓여가는 것. 죽을 때까지 실수하고, 배우고, 그렇게 깨달아가는 수 밖에 없는 것은 여행도 삶도 한가지구나, 섬광처럼 떠올렸다가 다시 언제나와 같은 얼굴로 비슷한 일상을 살게 되는 것. 아무 일 없는 평범한 날들 사이 사이, 막 익숙해지려는 곳의 플랫폼에서 모르는 곳으로 떠날 기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다가, 또는 내 집 부엌에서 설겆이감 숟가락을 문질러 닦다가 문득, 다시 예전의 깨달음이 섬광처럼 스쳐가고, 다시 잊고 살다가 또 떠오르기를 반복하며, 조금씩은 나아진 모습으로 아이는 엄마가 되고 엄마는 늙어가는 것. 사람들이 삶을 '여로(JOURNEY)' 라고 하는 이유일 것이다. 매우 식상한 말이지만.
그렇게 힘들게 찾아간 비드고시치 구시가는 차갑게 불어닥치는 비바람 때문에 거리를 걷고 보는 것 조차 어려웠다.
비드고시치 명물 '강을 가로지는 남자(A MAN CROSSING THE RIVER).'
바람이 꽤 세게 부는 날이었는데도 동상이 걸려있는 외줄만 출렁거릴 뿐, 동상은 끄덕없이 줄 위에 이 모습 그대로 있었다. 만든 사람이 최소 무게중심 달인이네, 라고 연짱이가. 뒤로 곡물창고(GRANARIES) 박물관이 보인다.
비드고시치 중앙우체국.
비드고시치 엽서에 꼭 등장할 정도로 비드고시치 상징 중 하나이자 랜드마크. 토요일 일요일 제외 24시간 열려 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건물이 우체국일까 싶겠지만 우체국이다.
비드고시치 명물이자 랜드마크 중 하나 '그라너리(GRANARIES).' 곡물창고.
지금은 곡물창고로 쓰이지는 않고 지역사 박물관 정도로 쓰인다. 신기하게 일반 주택가에서도 '그라너리 박물관'처럼 생긴 건물들이 꽤 보였다. 우리가 묵었던 포즈난 숙소 전체 건물도 이런 모양의 건물이었다. 현대식 건물에는 이와 같은 형태가 없는 것을 보면, 어느 한 때 이런 외벽의 건물이 유행했었나 보다, 생각하였다. 비드고시치는 강변도시라는 게 확실히 테가 나는 것이 브르다(BRDA) 강이 구시가를 관통하여 흐르기 때문에, 비드고시치 유명 랜드마크를 보려면 강도 함께 보게 된다.
구시가 전체가 '방앗간 섬(MILL ISLAND)' 인데, 염개미는 그런 박물관이나 건물 같은 것이 따로 있는 줄 알고 정말이지 구시가를 돌고 또 돌고. 춥고 비바람 몰아치는 날 연짱이가 고생 정말 많이 했다. 그러고보니 비드고시치에도 대관람차가 있었지. 구시가 입구 유원지에 있다. 약간 규모가 있다 싶으면 대관람차 없는 도시가 없구나, 폴란드는. 하지만 비바람 맞으며 이 추위에 대관람차라니.
브르다 강은 강폭이 매우 큰 강은 아니다. 유속도 빠르지 않고 느긋하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러 척의 배가 강 위에서 실제 운행 중이었다. 여전히 운행 중인 배와 강변에 면해 있는 큰 규모의 그라너리를 보니, 비드고시치는 주변 도시들에서 재배된 곡물이 집중되고 또 다른 도시로 풀려나가는 주요 항구이자 수상 교통의 요지 역할을 톡톡히 했겠구나, 쉽게 유추되었다. 한 도시가 해당 지역의 중심지가 되려면 반드시 강을 끼고 있어야 한다던 우리 엄마 정여사 님의 말씀이 옳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겨울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 도착하여 체류 내내 눈보라와 바바람 속을 힘겹게 걷다가, 겨울비를 맞으며 완벽한 우중도시 비드고시치를 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