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박물관(APPLIED ART MUSEUM), 그리고 구시가 15
미술박물관(APPLIED ART MUSEUM)은 미술에는 큰 관심없는 염개미의 마음을 두 번, 세 번 바꿔놓았다.
영어 설명이 없어서 나무판들은 아래 함에서 나온 장식일까. 가문의 문장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미루어 짐작하였지만, 함은 . . . 지금 보니 . . . 관은 . . . 아니겠지요.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좋아하는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한 설명이 있어서, 내가 아는 것과 다른 것이 있을까 하여 읽어보았다.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은 주로 인테리어 목적으로 16세기 발전하였는데, 특히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색채 판유리 기술이 퍼지면서 성장하였다. 작은 크기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은 개신교 국가들에서 매우 인기가 있어서 스위스에서는 시 당국이나 가족 축하행사에 선물로 인기가 많았다.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은 주인의 지위를 강조해주는가 하면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였고, 구약이나 성경 속 장면들, 예수님과 마리아의 생애, 격언 등이 메시지의 내용이 되었으며, 보통 건축 구조물 안에 세워졌다.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들은 이곳 유력 인물이 수집하였고, 그의 아들이 1911년 포즈난 황제 프레드릭 3세 박물관에 기증하였다가 1930년 비엘코폴스카 박물관이 구매하였다고. 워낙 스테인드 글라스를 좋아해서 특별한 내용이 있을까 싶어 읽어본 건데, 특이점은 없었다.
성이나 교회 장식으로 쓰인 것을 많이 봐서, 내게 스테인드 글라스는 세속적인 느낌은 없다. 주로 성경 속 내용을 주제로 하여 만들어졌다는 인식 뿐.
아무리 복원하였다고 해도 어찌 저래 비비드한 색감일까.
성경 속 인유는 아니고, 빌헬름 텔 관련 내용으로 16세기에서 18세기 제작되었다.
"칼이 . . . 종류가 엄청 많네. 칼집이 화려하기도 하고."
"화려하고 멋있으면 뭐해. 어차피 속 알맹이는 칼이고 사람 죽이는 살상도구로 만들어진 건데."
"아, 그러네, 딸."
임진왜란 때 우리 이순신장군님께서 옆에 차셨다는 '큰칼'은 들고 휘두르기에는 너무 크고 무거운, 이를테면 살상용이 아니라 지휘관의 상징적인 용도의 칼이라는 것을 읽은 기억이 난다. 사진 아래쪽 단검부터 위쪽 장검까지 상징적 의미로 보이는 칼은 없었다. 청동이든 철이든 농기구처럼 생활의 용도로만 쓰이기에는, 영토를 넓히고 제 소유를 주장하고 싶어하는 인류에게 금속붙이 특유의 수은빛 매끈함은 참을 수 없는 살상의 유혹이었는지도 모른다.
'NIE DOTYKAC.'
'타지 마시오(DO NOT RIDE)' 일까 싶어서 찾아봤더니, '손대지 마시오(DO NOT TOUCH)' 쯤 되는 말. 하지 말라면 꼭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만국공통인 모양이다.
평소 말에 별 관심 없었거니와 말을 자주 볼 기회도 없어서, 나는 마구가 이토록이나 화려한 줄 몰랐다. 화려한 것도 화려한 것이지만, 장식이며 발걸이까지 거의 모두 금속으로 되어 있고, 그 외 안장이며 말등을 덮는 덮개까지 무게가 어마어마해 보여서 조형물 형태의 말을 보며 상상해 본 말이 한없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온갖 장식 무게 위에 사람 무게까지 더해지고, 그 상태에서 빨리 오래 달려야 했을테니. 게다가 전쟁에서는 사람보다 먼저 죽기도 하지 않나. 우리는 무기박물관이나 전쟁박물관 같은 데는 가면 안 되겠어, 연짱이가 한 마디 보태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도 이와 같은 형태의 정교하게 장식된 반닫이나 빼닫이 같은 게 있었는데, 그 때는 왜 그게 귀한 줄 몰랐을고.
가구들은 천연 참나무 색과 염색한 참나무 색과 연한 자작나무 색이 대조를 이루는 중앙 유럽 17세기 전반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장식은 전형적인 실레지아 지방의 후기 르네상스 매너리즘 -- 기교 많은 이탈리아 미술양식 -- 을 보여주고 있으며, 옷장 내부 공간은 이단으로 나뉘어져, 양쪽에서 열리도록 되어 있다. 이것 역시 17세기 전반기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지금까지 박물관들 다녀본 바로 이러한 형태의 가구나 도자기들은 이탈리아나 스위스 장인들이 만든 것을 폴란드로 공수해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성이든 가구든 도자기든, 보기만 하면 어느 시대 무슨 양식이고 어디서 만들어졌군, 하고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해박한 사람이면 참 좋겠다.
이 아래 모든 그릇 사진들은 염개미의 개인 욕망이 투영된 것들이다. 이런 종류의 도자기 그릇은 몇 세기에 어디서 만들어진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저 갖고 싶다고요.
"엄마, 귀족들 복식을 보니 18, 19세기 쯤 된 것 같아 보여. 저렇게 입고 앉아서 티파티 같은 거 하고 그랬겠지?"
"그래봐야 어느 백작부인 새로 지어입은 옷이 오뜨 꾸뛰르에서 유행하는 최신상이래요, 뭐 그런 얘기나 하고 그랬겠지. 아니면 어느 공작가에서 사들인 광산에서 소금이 나왔다지 뭐예요, 그런 얘기거나."
"이 엄마가 그 시대에 무슨 오뜨 꾸뛰르야. 그리고 무슨 광산에서 소금이 나와. 그런 귀한 자원은 그 시대에도 국가에서 관리했겠지. 엄마는 이상한 시대극을 너무 많이 봤어."
부러워서 그런다, 부러워서.
"에잉? 그릇도 그릇이지만, 그릇 보호 케이스 저거 강화유리 아닌가? 어떻게 하면 강화유리가 저렇게 금이 가."
"엄마처럼 그릇에 대한 욕망이 강한 누군가가 너무 갖고 싶은 나머지 나쁜 마음 품고 한 번 깨봤을지도 모르지."
"너어느은, 엄마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야. 아무리 갖고 싶다고 강화유리를 깨겠니. 그리고 너도 그릇 좋아하잖아. 너는 안 갖고 싶어?"
"갖고 싶어. 하지만 유리는 안 깨."
나도 연짱이도 환장하는 그릇. 로얄코펜하겐 같은 엄청 비싼 그릇에도 댈 수도 없을 정도로 비싸겠지. 은식기 봐라.
그릇들 하나 하나가 완벽 내 취향이야, 그랬다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그릇은 손목 부러질 정도로 엄청 무겁지 않은 이상 호불호가 있을 수 없지 않을까. 값어치를 환산할 수 없으므로 어차피 생활 식기로는 쓸 수 없을테니, 무겁든 가볍든 상관 없으려나. 뚜껑 손잡이가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럴 때만, 그러니까 밥 먹고 티파티할 때만 그 시대 왕실 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뚜껑 꽃봉오리에 시선 붙박힘.
꽃봉오리 뚜껑 손잡이 있는 주전자로 딱 하나만 주세요. 아니, 세트로 주세요, 세트로. 어헝. 그릇 유리장에 딱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나를 연짱이가 질질 끌고 나왔다. 거기서 살고 싶었다고.
포즈난 미술박물관 관람료는 어른은 12 즈워티지만 학생은 1 즈워티이다. 가족 단위 관람객도 많았고, 낄낄거리지 않고 진지하게 관람하는 중, 고딩들이나 손에 손 꼭 잡고 관람하는 대학생 커플들도 꽤 많았다. 이곳 포즈난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이 자판기 커피 한 잔 가격으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놀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마련된다면,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예술적 소양을 갖춘 공감능력 탁월한 어른들이 많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이토록이나 질 좋은 예술품이나 역사적 가치 담긴 박물관을 겨우 350원에 누릴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흠 . . . 이래서 포즈난을 교육도시라고 하는건가?
포즈난 로얄 캐슬 앞마당. 겨울이라 초록초록하거나 풍성하지 않았는데도 아기자기하고 참 예쁜 정원이었다.
"아, 똑같은 사진 왜 자꾸 찍고, 또 찍고 하라고 해, 엄마는."
"구시가 광장 골목에서 보이는 게 로얄 캐슬 이 쪽 면이니까 꼭 찍어줘, 연짱이."
춥고 손 시려운데 엄마가 자꾸 사진 찍어달라고 주문을 해서 연짱이 짜증이 슬슬 시동걸리기 시작하더니.
이 사진을 끝으로 오늘 연짱이 사진은 끝이다. 나머지는 전부 내가 찍었 . . . 기 때문에 오늘 사진은 망각이다.
로얄 캐슬에서 나와 땅거미 일찍 내리는 동유럽 오후의 구시가 거리를 발길 닿는대로 걸었다.
구시가 중심광장을 조금 벗어난 거리. 구시가 내 메인거리 중 하나다.
흔한 상점도 운치 있어 보이는 포즈난 거리. 이 길을 따라 걸어가면 구시가 중심 광장이 나온다.
성벽에 둘러싸인 포즈난 구시가.
정오 정각에 시청사 탑에서 나와 서로 뿔을 부딪는다는 구시가 '염소들'을 포기하고 -- 시청사는 2020년 현재 보수 중이어서 어쨌든 '염소들'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 로얄 캐슬에서 꽤 긴 시간을 보낸 것을 연짱이도 나도 후회하지 않았다. 구시가를 비롯,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익숙해져서인지 교육도시이자 유서깊은 포즈난의 모습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구석 구석 깊은 역사를 보여주는 오래된 건물들이 구시가 특유의 돌바닥과 어우러져, 묵직한 세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진한 애수를 피워내고 있었다.
내가 유럽에 있구나. 성벽에 둘러싸인 구시가에서 아주 예전 누군가가 걸었던 그 길을 21세기 청년 연짱이가 자박 자박, 걷고 있구나. 가슴이 뭉클하였다. 싸리보다 작은 눈 휘날리고 귀가 아플 만큼 춥고 흐린 동유럽 날씨였지만, 그래서 더 아린 손가락이었지만, 사진기를 들고 손가락이 빨갛게 얼도록 중세의 흔적이 남은 도시의 거리를 찍고 또 찍고 걷고 또 걸었다. 다시 오지 않을 곳이라 더 마음 찡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시간이 다 그러하지만, 유독 여행 중이면 마음을 후벼내도록 사무치는 '내 생에 단 한 번 뿐인 장소, 그리고 단 한 번 뿐인 시간' 이라는 자각이 물밀어 들어온다.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되돌릴 수도 없는 유한한 나의 시간, 나의 순간들. 아, 한없이 무겁고 적막하게 내리누르는가 했더니, 나무 전체를 흔들어 가득한 황혼의 잎새를 후두두, 휘몰아가는 겨울바람처럼 존재 자체를 집어삼킬 것 같은 정서에 숨이 찼다. 사진기 내려놓고 그 자리에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상반되는 감정들에 숨도 못 쉬고 가만히 멈춰 서 있는 나의 찬 손을 연짱이가 꼭, 잡아주었다.
"엄마, 나랑 같이 또 오자."
"어?"
"나 취업해서 돈 벌면 나랑 같이 또 오자고. 여기 말고도 야경 근사하다는 데도 가고, 오로라도 보러 가자, 엄마."
귀 아파서 비행기 타기 싫다고 울고, 더워서 걷기 싫다고 엄마 등에 업혀 다녔던 나의 아이는 언제 이렇게
컸을까. 지금 내 옆에 서서 파랗게 얼어붙어 눌린 마음 잡아주는 연짱이는 여전히 퐁첵 한 개 더 먹겠다고 엄마와 실랑이하는 그 연짱이인데. 아이가 가진 여러 모습을 가장 모르는 사람은 아이의 조그맣고 예쁜 어린시절 단 하나에 붙박혀 있느라, 그 한없는 익숙함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소록소록 성장해온 아이에 대해서는 눈 감고 귀 막고 싶은 엄마라는 이름의 나인지도 모른다. 슬금 어두워져 어느 새 호박빛 조명 들어온 '마지막' 포즈난 구시가의 정서 때문이 아니라, 나이들어 조금씩 체온 낮아져가고 이제 더는 젊지 않은 엄마 손을 이 순간 따뜻이 잡아주는 연짱이가 고마워서, 마음이 찡하였다.
"그러자. 꼭 그러자, 연짱이."
나는 아직은 짱짱한 엄마, 생명력을 품어 오롯이 틔워내는 봄의 대지, 데메테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