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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즈난(1), 그늘과 그늘과 그늘

THE BRIGHT SIDE OF POZNAN, THOUGH 14

세상에는 아무리 자주 대하여도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것들이 참 많다.  '마지막' 이 주는 정서 역시 그 중 하나다. 해도 뜨기 전 크라쿠프를 떠나왔다. 


겨울 해가 아직 뜨지 않아 어둠이 가시지 않은 크라쿠프 중앙역 플랫폼. 


떠날 시간이 되면 차장 아저씨가 주변을 살핀 뒤 호각을 불어 출발을 알린다. 기억이 아스라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들어본 지 오래된 출발 호각소리가 호박빛 조명 아래 유독 구슬펐더랬다. 


안녕, 크라쿠프. 


그렇게 크라쿠프를 떠났다. 


전 날 도착한 포즈난은 잔비가 밤새 그치지 않고 내렸는지 커튼을 걷고 내다 본 숙소 뒷마당이 젖어 있었다. 포즈난의 첫 인상은 꽤 난감하였다. 길거리는 개똥 천지에 개들이 화단 흙을 파헤쳐 주택과 빌라마다 조성해놓은 화단 주변은 죄다 엉망이었고, 구시가로 이어지는 돌길은 돌틈과 돌틈마다 담배꽁초에 가래침에 깨진 유리병 파편이 빼곡히 박혀 지저분하고 위험해보였다. 개똥과 가래침과 유리 파편을 피해 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참 조심스러웠다. 


"포즈난은 교육도시라면서 왜 이렇게 지저분하고 정돈도 안 되어 있고 음울하고 활기도 없어? 게다가 이 추운 겨울에 구걸 아줌마들하고 개들 앵벌이시키는 아저씨하고 아픈 비둘기까지. 왜 유독 포즈난만 이러냐고. 폴란드 와서 구걸하는 사람이 이렇게 흔한 도시는 포즈난이 처음이야. 행복한 사람만 있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너무 속상해." 


연짱이는 염개미를 따라 동남아시아 이곳 저곳을 다니기 시작하였던 다섯 살 꼬마 적부터 유난히 구걸하는 아이들이나 인형처럼 작은 아이를 안고 구걸하는 어린 엄마들에 대해 민감하게 굴었다. 초딩 저학년 즈음부터는 구걸하는 제 또래 아이들에게는 저 먹으려던 물이나 먹을거리를 나눠주었지만, 젖먹이 아기를 안고 구걸하는 어린 엄마를 보면 화를 냈다. 아이는 구걸하는 엄마를 보며 자란 아기 역시 구걸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좀 더 커서 저개발국가들의 사회구조 상 사회하층민의 구걸은 어쩔 수 없는 면이 크다는 것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 후부터 아이는 예전처럼 무턱대고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슬픈 얼굴을 하였으며, 구걸하는 이들을 '도와'주는 행위에 대해 제 나름의 기준을 정해두는 듯 보였다. 


루마니아를 여행하였던 고딩 진학 무렵 연짱이의 '도움' 행위의 기준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물러터지고 종종 일관성 없는 나와 달리, 아이는 단호하고 나름 논리가 선 태도로 구걸하는 청소년이나 가족, 어린아이들을 대하였다. 여행지가 동남아시아인가 동유럽인가에 따라 유연하게 굴었지만 큰 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누구에게 먹을거리를 주고 누구에게 돈을 줄 것인지, 그리고 돈의 액수의 상한선은 얼마인지 아이가 정한 기준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루마니아 시기쇼아라에서 만난 집시 청소년에게 연짱이는 갖고 있던 동전을 거의 다 주었는데, 하루 분 빵을 충분히 사먹을 수 있을 만큼의 돈이었다. 더 달라는 집시 청소년에게 연짱이는 단호하게 안 돼, 라고 말하였다. 왜 안 되냐는 나의 물음에 연짱이는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서 있던 사람들에게서 이미 많이 얻었고, 한 번에 너무 많은 돈을 구걸하여 가면 집시 청소년의 부모는 아이를 더욱 더 돈벌이 대상으로만 대할 것이고, 그 돈으로 집시 부모는 혹여 다른 것(약)을 구하려고 할 지도 모른다고 냉정하게 대답하였다. 그런 부모를 보며 자란 집시 청소년이 할 것이 무엇이겠어, 아이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하였었다. 시기쇼아라 구시가에 세워져 있던 '구걸로 인한 약물남용 경고' 표지판을 아이는 기억하고 있었다. 구걸은 구걸로 끝난다는 것을 아이는 동남아시아 여러 여행지에서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연짱이는 어린아이들에게는 먹을거리를, 장애인에게는 하루치 먹을거리를 살 수 있는 돈을 주었다. 장애인에게는 왜 돈을 주느냐는 내 물음에 연짱이는 저개발국가에서 장애인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라고. 꽤 명료하고 담담한 대답이었지만, 아이가 슬퍼하는 게 느껴져서 나는 울컥, 하였었다. 


"마음 아프지만 구걸 아줌마는 그냥 두고, 덩치가 큰 멍멍이들은 한 번 도와줄 거고, 아픈 비둘기는 . . . 먹이활동이 거의 어려운 한겨울이라 어차피 죽겠지만, 그래도 목숨이 걸린 문제니까 사람들이나 차가 다니지 않는 길 구석에 놓아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그런데 멍멍이 사료 사라고 도와준 돈으로 술 퍼마시고 그러는 거 아니야?" 

"엄마가 볼 때 너는 적성검사에서 나온대로 대학 진학을 해야 했어. 생활과학도 말고 법학도가 되었어야 했다고." 

"그런 무서운 말은 이제 그만해, 엄마. 나는 그렇게 길게 오래도록 공부하고 싶지 않다고." 


마냥 순진하기에는 세상의 모순을 어려서부터 많이 본 우리 연짱이. 


구걸문제는 그렇고, 포즈난은 어떡하지. 이래서는 안돼. 모든 일 모든 상황에는 양면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OK, LET'S GO TO SEE THE BRIGHT SIDE OF POZNAN!   


비에 젖어 애련해 보이는 포즈난 구시가 중심 광장. 전쟁기념박물관과 비엘코폴스카 봉기박물관, 시청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염개미와 연짱이의 목적지는 비에 젖은 구시가를 발길 닿는대로 걷는 것, 이 아니라 역사박물관을 겸하고 있는 시청사. 하지만. 


포즈난 역사박물관(HISTORICAL MUSEUM OF POZNAN) 겸 시청사(OLD TOWN HALL). 

문 닫았다. 출입문에 붙어 있는 파란 공지문에 따르면, 2021년 9월에 다시 문 연다고. 게다가 건물 중앙 작은 포탑의 시계 바로 위에는 매일 정오 한 쌍의 염소가 나와 서로 뿔을 부딪히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시청사가 문을 닫으면서 그것도 닫아 놓았다. 가는 데 마다 우리에게 왜 그리 인색하게 구는 것이오. 


강(물)과 관련된 성인이신 성 존 네포무크 (JOHN OF NEPOMUK). 

앞서 크라쿠프 소금광산에서도 뵈었는데, 이 분 여기서도 또 뵙네. 포즈난의 반복되는 홍수로부터 도시를 보호해주기를 바라며 세운 동상인데, 결과적으로는 1960년대 포즈난을 감아 흐르는 바르타(WARTA) 강의 물길을 바꾼 덕분에 포즈난은 홍수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삼지창을 든 넵튠. 

홍수 때문에 늘 고난을 겪었던 포즈난. 물 관련 성인이나 신의 동상은 그래서겠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하데스. 

하데스는 어느 날 강가에서 놀고 있던 페르세포네를 자신의 땅, 명부로 납치한다. 그리스신화에서 명부는 죽은 이들이 가는 지하세계 즉, 생명이 없는 자들의 세계를 의미할 뿐 지옥의 개념은 없다. 페르세포네는 대지와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인데, 딸을 잃은 데메테르는 딸의 납치, 억류를 방관하는 신들에 분노하여 여신의 할 일을 하지 않는다. 데메테르의 보이콧으로 땅은 수확을 내지 못하는 불모지로 변하고 인간들은 굶주려 죽어갔다. 결국 제우스의 중재로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의 지하세계에서 생명이 없는 자들과 매 년 삼개월을 보내고, 나머지 날들은 엄마 데메테르와 보낸다. 페르세포네가 없는 동안 데메테르는 식음을 전폐하고 대지를 돌보지 않고, 그에 따라 모든 종자는 땅속에 숨고 밭은 헐벗는다. 하지만 페르세포네가 엄마 데메테르가 있는 지상으로 돌아오면, 곡물의 종자는 흙속에서 자라고, 대지는 종자를 품어 풍성하게 꽃 피고 열매 맺게 한다.  


페르세포네는 선 그리스기의 여신 코레(CORE)와 동일 인물이다. 코레는 곡식 자체가 가진 생장력 즉, 종자의 번식력을 의미한다.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에 억류되어 있는 시간, 곡식이 발아할 수 없는 시간은 겨울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들의 계절에 대한 이해를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겨울을 생명의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기간, 혹은 휴식기라고 이해하였던 것. 나보다 천 년 이상을 앞 서 살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뉴 밀레니엄을 살고 있는 나보다 지혜롭구나. 노년을 향해 가고 있는 나의 현재를 나는 활동과 성장을 멈춘 '겨울기' 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다. 아직은 '겨울'을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해서는 안 되는데, 염개미. 꽃 피우고 열매 맺을 페르세포네를 아직은 짱짱하게 품어줘야 하는데. 생명력 자체인 나의 연짱이를 위해 염개미는 엄마의 할 일을 벌써 놓으면 절대 안 되는 거다. 


전쟁의 신 마르스. 

마르스는 로마신화 속 전쟁의 신이다. 같은 전쟁의 신이어도 마르스는 로마에서 추앙받는 신이었고, 그리스신화의 아레스는 인간의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본능을 상징하며, 피와 살육을 즐긴 신으로 되어있다. 뭐 나는 같은 전쟁의 신이라도 지혜와 전술전략을 바탕으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상으로 여기는 아테나 편이다.


포즈난 구시가 중심광장에 있는 분수 동상 중 넵튠과 마르스, 그리고 사진에는 없는 아폴로는 2002년과 2005년 복원된 것이고, 페르세포네와 하데스 동상만 1766년 만들어진 원본이다. 


구시가 길거리에서 만난 비둘기. 

이 녀석이 예외일 뿐, 폴란드든 우리나라든 산새, 멧새는 날렵하고, 비둘기는 닭둘기다. 참, 폴란드 도시 새들은 우리나라와 달리 삼파, 사파전이다. 우리나라 도시에 사는 비둘기와 까치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 경쟁하고 싸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 나라는 비둘기, 폴란드 까치, 까마귀, 그리고 강이나 바다가 가까이에 있는 도시에서는 갈매기까지 가세하여 먹이경쟁이 어마어마하다. 그나마 비둘기와 폴란드 까치만 있는 도시에서는 두 새의 덩치에 별 차이가 없어서 경쟁 구도가 거의 엇비슷하게 이루어지지만, 강이나 바다가 가까운 이를테면 비드고시치나 그단스크에서는 덩치 큰 갈매기가 양아치처럼 먹을거리를 뺏고 독점하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비둘기나 폴란드 까치가 갈매기에게 형편없이 밀리지는 않지만. 


구시가 근처를 조금 걷다가 만난  '할라 타르고바(HALA TARGOWA)'. 


나는 크라쿠프에서 할라 타르고바를 보았을 때, 그 명칭이 크라쿠프 시장의 고유명칭인 줄 알았다. 폴란드에서 할라 타르고바는 재래시장 혹은 전통시장이라는 의미인 것을 이 곳 포즈난에 와서야 알았다. 겨울이어서 크라쿠프도, 포즈난도 이런 유형의 재래시장은 활발하지 않았다. 꽃, 채소, 과일, 정육, 종자, 가끔은 보세옷도 파는 작은 규모의 시장이었는데, 비수기여서 그런지 원래 시장 규모가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물품이 유독 신선한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마트에 비해 저렴한 것도 아니고, 단기 여행자에게는 별 해당 사항이 없는 물품들이 대부분이어서 금세 흥미를 잃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꽃을 좀 살 것을 그랬나 보다. 


구시가 골목. 골목 끝에 보이는 건물이 염개미와 연짱이가 문 닫은 시청사 대신 가려는 곳이다. 어디일까요. 


우리가 가려는 골목 끝 건물의 정체는. 프제미즈우 성(ZAMEK PRZEMYSŁA) 또는 로얄 캐슬(ROYAL CASTLE OF POZNAN). 13세기 중반 폴란드 왕 프제미즈우 1세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하여 14세기 전반에 완성되었는데, 확실하게 말하면 카지미르 대왕(CASIMIR THE GREAT)의 통치 기간에 완성되었다. 브와디스와프(WŁADYSŁAW THE ELBOW-HIGH) 시대부터 성은 주지사의 거주지가 되었다. 


이 왕의 이름이 재미있어서 찾아보았는데, 크라쿠프 바벨성에서 언급되었던 라디슬라우스 1세와 동일인물이었다. 즉, 단신왕 라디슬라우스(LADISLAUS THE SHORT), 라디슬라우스 1세(LADISLAUS 1), 난쟁이왕 브와디스와프(WŁADYSŁAW THE ELBOW-HIGH)가 모두 동일인물에 대한 호칭이라는 것. 유럽 귀족들의 경우 이름 외 관명이라는 것이 있고, 왕이 되면 왕을 지칭하는 이름이 또 있으니 딱히 이상하지는 않지만, 뒤에 붙는 호칭이 'THE SHORT' 가 뭐야 싶었다. 자국의 왕 호칭을 '작은 사람, 단신' 이렇게 부르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재위기간을 살펴보고는, 통치기간이 이 십 년 정도 된 것을 확인하고, 소년왕으로 등극해서 요절하였나 보다, 그랬었다. 그런데 이 로얄 캐슬에 대해 알아보다 보니 정말 '단신왕' 이었다는 것! 얼마나 키가 작았으면 '팔꿈치에 닿는 키' 라고 하였을까. '슈렉'에 나오는 '파콰드' 영주도 아니고. 이것에 대해 후세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이 왕의 아들이 그 유명한 카지미르 대왕이고, 카지미르는 신장이 183CM 정도 되었다고. 아들이 그렇게나 큰데 그 아버지가 난쟁이 -- 무려 난쟁이(DWARF) -- 일 리 없다는 주장이 많다. 아니 자국 왕 이름을 왜 그렇게 지어요. 우리나라 조선시대 왕들 중 욕 엄청 먹는 몇몇 왕도 그냥 '조' 붙여주는구마는. 


어쨌든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은 1536년 도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안드르제이 고르카( Andrzej Górka) 주지사에 의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그 후 대홍수와 전쟁으로 더 많이 파괴되었고, 1716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성이 습격당하기까지. 1721년에 부분적으로 재건되었지만, 그 무렵부터 성은 눈에 띄게 쇠퇴하였다. 폴란드 2차 분할점령 이후 성은 프로이센 섭정기간을 거쳐 항소법원 -- 우리식 고등법원 -- 으로, 1885년 이후 국가기록보관소로 쓰였다. 이 성은 폴란드 통치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왕실결혼식도 여러 번 개최되었고, 특히 지기스문드 1세가 이 성에 여러 달 머무르는 동안 왕비는 딸을 출산하기도 하였다고. 중세풍 배럴 볼트 -- 반원형 둥근 천장(BARREL VAULT) -- 가 지상층에 보존되어 있고, 북서쪽 벽 바깥쪽에는 13세기 말의 오래된 성벽 조각이 있는데, 비엘코폴스키 광장에 가면 잘 보인다고. 


포즈난에서 염개미와 연짱이가 가장 좋았던 곳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는 곳. 


로얄 캐슬(ROYAL CASTLE) 출입구. 겨울절기에는 아침 10시부터 개장한다. 


티켓을 구입하고 들어오면 접하는 0층(지상층)은 미술박물관(APPLIED ART MUSEUM) 이다. 사진은 지상층에서 바로 볼 수 있는 전시물. 처음에는 이게 뭔가 했는데, 굴뚝으로 들어온 그림 속 악마 꼬리였다. 액자에 들어 있는 그림에는 이곳 포즈난과 바르타 강, 프제미즈우 산에 얽힌 전설이 숨어 있다. 


"하나님께 바쳐진 십자가와 교회들이 레히테스 땅에 나타나기 시작하자, 악마들은 그 꼴이 보기 싫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온 세상을 다 쓸어버리기로 했어요. 바르타 강물을 막아서 온 세상을 가라앉히려는 속셈이었어요. 칠흙보다 더 어둡던 밤 폴란드 전역에 살던 이름 헤아리기도 어려운 온갖 악마들이 모여 손에 손을 잡아 지옥의 사슬을 만들고, 이교도들이 숭배하는 니아 여신의 산에 사슬을 드리우고는 산을 들어올려 바르타 강에 빠뜨리려고 하였어요. 악마들은 산을 어깨에 지고 바람처럼 빠르게 들판을 지나고 깊은 강을 건너 포즈난 가까이까지 왔어요. 바르타 강은 가까웠고, 악마들은 신이 났어요. 아, 그 때였어요. 수탉 한 마리가 울자 -- 아마도 날이 밝자 -- 악마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어요. 니아 여신의 산은 바르타 강 근처에 빠져 그대로 포즈난의 한 부분이 되고 말았어요." 


연짱이가 열심히 맞춘 퍼즐. 내 눈에는 위의 사진 원본과 똑같아 보였는데, 미묘한 색감 때문에 틀렸다고 맞추고 또 맞추고. 


연짱이와 퍼즐과 악마 꼬리의 상관관계. 

맞추고 있는 퍼즐의 원본에 얽힌 얘기 따위 알 바 없이 퍼즐은 퍼즐일 뿐. 그러니까 연짱이는 연짱이고, 퍼즐은 퍼즐이고, 전설 속 악마 꼬리는 그냥 악마 꼬리이고. 공부를 그렇게 집중하여 열중했다면, 우리 연짱이 전국구에서 뛰놀았을텐데. 


그림 속에는 악마가 단 두 마리 뿐이지만, 실제 전설에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악마들이 돌덩이 아닌 커다란 산 하나를 통째로 옮기려고 하였었다. 하여튼 사람이나 악마나 남 잘 되는 꼴 못 보는 것들은. 


13세기 고딕 성의 기초를 간간이 보여주도록 만든 미술박물관 내부 인테리어. 13세기에 지어진 성이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전시관 중간 중간 이런 식으로 인테리어를 해두었다. 


연짱이가 퍼즐 맞추기에 열중하고 있는 동안, 나는 0층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보았다. 0층을 다 돌아본 후 박물관 관람 순서에 따라 포즈난 구시가 전망을 보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 전망대로 올라갔다. 춥고 바람 불고 흐리고 비 내리는 궂은 날이었는데도 전망은 매우 훌륭하였다. 그래. 겨울 우기가 아닌 절기의 포즈난은 음울하지도 칙칙하지도 않을 것이다.  


로얄 캐슬(ROYAL CASTLE) 7층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흐린 포즈난 구시가 전경.  


멀리서 보니 음울하지도, 칙칙해보이지도, 지저분해보이지도 않는 포즈난 구시가. 포즈난에 애정이 없으니 지저분한 것들이 먼 거리에 감춰져 보이지 않아서 차라리 마음 편하였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상황이든, 애정이 깃들면 거리감이란 건 없어지게 마련이다. 거리감이 없어진 자리에 대상에 대한 친밀감과 애정만 자리하면 좋겠지만, 친밀감과 애정의 무게만큼 진한 감정이입이 흔하게 들어서고, 그 때문에 대상과 나를 동일시하는 일이 당연시 되기도 한다. 너를 위한 거야, 라는 말 속 '너'는 어쩌면 '나'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연짱이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던 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연짱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들이었을지도.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거리두고 지켜보고 기다리기. 그만큼 힘든 것 또 하나.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는 나무처럼, 변함 없고 익숙하여 어느 새 고맙고 소중한 마음을 잊은 나의 모든 일상,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새롭게 바라보기. 그리하여 그 익숙한 관성과 타성 깨뜨리기. 어렵지만 내가 연짱이를 위해, 나를 사랑해주는 이들을 위해, 또 나 자신을 위해 전 생애 내내 꼭 해내야 하는 것들이다. 이런 기특한 생각을 다 하고, 어쩐지 흐리고 음울한 포즈난에게 고마워졌다. 


폴란드 사람들은 대관람차를 좋아하나 봄. 포즈난 뿐 아니라 비드고시치, 그단스크에서도 대관람차를 볼 수 있었다. 그단스크는 강과 바다가 있는 곳이라서 대관람차가 있다지만, 포즈난은 . . . 전설 속에 나오는 바르타 강이 있구나. 대관람차에서 바르타 강이 보이나? 


염개미도 연짱이도 사진 속 전망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다. 각도가 그렇다. 구시가 중심광장의 구 시청사가 제일 높아서 제일 잘 보인다. 


20세기 이 전의 포즈난 도시 구획도. 

지저분하고 음울한 구시가와 주택가 첫 인상 때문에, 기차에서 만난 진상 포즈난 주민 몇몇 때문에, 그리고 시내에서 만난 거칠고 무례한 사람들 몇몇 때문에, 이토록 예쁘고 가지런한 포즈난을 나도 연짱이도 그토록 홀대하고서 떠나왔다. 


반 층 쯤 더 올라가면 야외 전망대가 나온다. 날이 너무 춥고 바람 엄청 많이 불고 흐려서 사진 찍기 힘들었지만, 불굴의 연짱이가 엄마를 위해 몇 장 찍어주었다. 사진 구도와 수평 잘 맞추는 연짱이지만, 다 날려버릴 것 같은 비바람이라. 그래도 멋진 포즈난 구시가 전망이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그대로 나가려는 나를 연짱이가 잡았다. 미술박물관인데 퍼즐 맞추기만 하고 전망대만 있겠냐고. 여기 '미술박물관(APPLIED ARTS MUSEUM)' 이라고. 응용미술은 관심 없는데, 하고 갔다가 안 갔으면 후회할 뻔 하였다고 바로 말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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