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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룬(1), 어서와, 생강빵 박물관은 처음이지?

생강빵 박물관, 다식 틀과 생강빵 틀의 공통점 18

떠나는 날의 비드고시치는 맑았다. 꼭 이러더라. 그래도 날씨가 꽤 쌀쌀한 탓에 공기가 청량하여 좋았다. 포즈난을 떠날 때는 작별의 시원함이 제대로 못 둘러보고 떠나는 아쉬움보다 컸는데, 비드고시치는 아쉬움이 더 컸다. 날씨가 단 하루라도 맑았더라면 참 좋았을 비드고시치. 


나와 연짱이가 비드고시치 중앙역까지 타고 온 지역선. 


기차역은 비드고시치 비엘레비 같은 간이역이든 비드고시치 중앙역 같은 주요역이든 떠남과 돌아옴 작별과 만남의 아련한 정서가 스며있다. 사람들은 평생 어찌 그리 갈 곳이 많을까. 은유적으로든 글자 그대로든 가까운 곳, 먼 곳, 그리고 매 번 돌아올 곳 혹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곳까지 갈 곳이 많아서 우리 삶은 고단하기도 하지만, 또 그 고단함에서 위로를 받기도 한다. 떠나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고단함이 주는 위로는 삶이 곧 여정이라는 말이 참 서글프면서도 맞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언제나 낯선 객일 수 밖에 없어 고단한 기차역은 익숙하고 편안함 속에 한없이 붙박히고 싶다가도 문득 뛰쳐나가 낯선 객이 되고 싶어하는 고단함이다. 


연한색 머리카락 찰랑이며 도움을 준 예쁜 토룬 천사님 덕분에 아무 일 없이 숙소 체크인을 하고 하루를 마감하였다면, 다시 한 번 흔한 타성에 젖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겠지만.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절대 일어날 일 없다고 연짱이가 단언하였던 일이 정말 우리에게 일어났다. 신분증을 목에 건 사복경찰이 버스 티켓 검사를 했던 것. 키 크고 덩치 크고 위압적인 아저씨였는데, 그 때 버스에 있던 사람은 나와 연짱이, 그리고 유모차를 탄 아기와 아기 엄마 뿐이었다. 연짱이에 따르면 아저씨는 아기 엄마에게는 버스 티켓을 보여달라고도 하지 않았다고. 그러니까 처음부터 누가 봐도 관광객인 나와 연짱이가 아저씨의 타켓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나와 연짱이는 트램이든 버스든 타자마자 바로 티켓 펀칭을 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 없었지만, 깜빡 하였든 고의로 그러하였든 티켓을 구매만 하고 펀칭을 하지 않으면, 부정승차로 간주되어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야 한다. 폴란드는 물가대비 교통비가 매우 저렴한 편은 아니어서 둘이서 시내 이곳 저곳을 여러 번 왕복하면 교통비 부담이 꽤 되지만, 그렇더라도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정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번처럼 예기치 않은 횡액을 만날 수도 있다. 


숙소 체크인을 하고 나니 이미 오후 3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동유럽의 겨울은 4시 즈음이면 깜깜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다시 구시가로 나가 관광객 모드로 무언가를 하기 꽤 애매한 시간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숙소 주변에서 장을 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어서 주변 큰 마트를 검색해봤더니 '폴로(POLO)' 라는 체인이 주로 잡혔다. 폴란드는 각 주나 도시마다 주력 마트가 다른걸까? 우치와 쿠라쿠프에서는 어디를 가든 '까르푸'가 있었고, 포즈난은 '피오트르 이 파베우(PIOTR I PAWEŁ)' 외에 자잘한 마트들이 산재하여 영업 중이었고, 비드고시치는 큰 쇼핑몰마다 '까르푸'가 있었는데, 토룬은 큰 쇼핑몰에는 대체로 '리들(LIDL)' 이 있는 것 같았다. 편의점 격인 자브카나 비에드롱카는 식품의 경우 신선도가 떨어져서 물이나 음료수를 구입하는 것 외에는 웬만하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다른 도시에서는 한 집 걸러 하나씩 있을만큼 흔하였던 자브카가 어쩐 일인지 토룬에서는 그리 흔히 보이지는 않았다. 


'폴로' 마트는 규모가 좀 큰 동네 마트 같았다. 포즈난에서 쌀과 라면을 사들고 왔던 터라 열흘 넘도록 고기 한 점 못 먹는다고 슬퍼하는 연짱이를 위하여, 집에서 가져온 약고추장을 양념장 삼아 토룬에서 돼지고기를 구워먹어보기로 했다. 과일, 채소부터 정육 명칭까지 다 알아갔지만, 슬프게도 폴란드 사람들은 이방인의 서툰 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앞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외국인인 우리와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걱정한 정육 코너 아줌마가 "여기 영어할 줄 아는 사람 좀 도와줘 봐," 하여 우리 바로 뒤에 서 있던 커플 중 오빠가 도와주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서로 다른 언어는 먹을거리 구입에 별 장애가 되지 못하였다. 만국공통어인 손짓 몸짓과약간의 유머면 충분하였다. 유머러스한 정육 코너 아줌마는 돼지목살을 기계 없이도 손으로 매우 얇게 썰어주어서 먹기 좋았다. 


"와, 언니, 진짜 프로페셔널이세요." 

"프로? 그러지, 내가 많이 프로지."  

"기계보다 더 잘 써시네." 

"내 손이 또 기계보다 낫거든."  


각각 한국말과 폴란드 말로 오가는 대화였지만 누가 들어도 무슨 말인지 다 알아서, 나와 연짱이도 줄 서 기다리던 사람들도 정육 코너 아줌마도 모두 빵 터졌다. 엄마, 나 토룬 정말 좋아, 하는 연짱이의 말로 토룬에서의 첫 하루가 유쾌하게 마감되는 동시에, 토룬 일정이 기분좋게 시작되었다. 


누군가 내게 그랬다. 새벽에 깬 잠이 더는 이어지지 않는 건 당신이 노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아니, 시차로 인한 곤함 때문이라고, 숫자에 불과하지 않은 것 같은 나이를 애써 지워본다. 벌써 이번 여행 마지막 두 도시인 토룬과 그단스크만 남겨두고 있는 시점이어서, 새 아침을 호흡하는 폐 속이 기대감과 서운함으로 꽉 찼다. 


"엄마, 기다리고 기다리던 생강빵 박물관 가는 날이야. 손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만들어주겠어." 


토룬에는 생강빵 박물관이 두 군데 있다. 그 중 토룬시에서 운영하는 '뮤지엄 토룬스키에고 피에르니카(MUSEUM TORUNSKIEGO PIERNIKA)' 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생강빵 박물관이다. 다른 하나는 상업 박물관인데, 시 운영 박물관과 생강빵 만들기 체험은 똑같지만, 상업 박물관 입장료가 더 비싸다. 


시에서 운영하는 생강빵 박물관. 
상업 박물관과 체험 프로그램 똑같고, 내용 역시 알찬데, 관람 가격은 더 저렴하다. 하지만 다른 박물관에서는 되던 학생 할인 적용이 안 되었다. EU권 학생이 아니면 학생 할인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유럽은 은근히 이런 데가 많더라. 쳇. 하지만 박물관 출입문을 열고 들어선 염개미와 연짱이를 나직히 감아도는 생강과 계피향은 할인적용을 받지 못한 스트레스와 짜증을 눅여주기 충분하였다. 


"엄마, 생강향이나 계피향이 이렇게나 좋은 줄 몰랐어." 

"그러게.  빵 굽는 냄새하고 섞여서 더 좋은 것 같네."  


토룬은 튜튼기사단이 세운 도시여서 생강빵 박물관에 온 이방인을 맞아주는 분도 연세 지긋하신 튜튼기사님.


"엄마, 저 분 느낌이 꼭 '토룬 생강빵 최고 장인의 정체는 튜튼 기사인 것으로 밝혀져' 같은 호기심 자극하는 황색신문 속 주인공 같아." 


흠 . . . 기사님이 만들어주시는 생강빵은 어떤 맛이려나. 


사진만 봐도 박물관 전체에 스며있던 생강빵 향이 코끝에 저절로 재생된다. 참 그립다. 


생강빵 만들기 체험시간까지 30분 정도 여유가 있어서 연짱이와 박물관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사실 생강빵 만들기 체험 후 우리가 만든 생강빵이 구워지는 동안 가이드와 함께 박물관을 돌아보며 설명을 듣는 시간이 이어지지만, 폴란드 말로 이루어지는 내국인 전용이어서 나와 연짱이에게는 너네가 알아서 돌아보라고. 영어로 된 소책자라도 있으면 참 좋을텐데, 아쉬웠다. 


"와, 엄마, 이거 다 생강빵 틀이지? 무슨 틀까지 이렇게 예뻐." 


생강빵 만들기 전 연짱이는 생강빵 틀에 완전 홀릭되어서 구경, 구경, 또 구경. 예쁘긴 참 예뻤다. 


생강빵 틀. 


참 정교하게 만든 생강빵 틀. 


"엄마, 나는 이 틀이 제일 예뻐." 

"이 틀 매우 유명한 틀일 걸. 토룬 엽서에서 봤어." 


오래된 테가 역력한 틀이지만, 갈라진 데는 있어도 틀어진 데는 없다. 그 이유를 생강빵을 만들면서 알게 되었다. 생강빵 반죽을 틀에 넣기 전 반죽이 틀에 들러붙지 않도록 틀 안 쪽에 먼저 기름칠을 하는데, 그것이 오래도록 나무 틀이 틀어지지 않는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속 생강빵 틀. 

기성 생강빵은 거의 대부분 이 모양이다. 음 . . . 생강 모양을 표현한 것인가 보다. 


"엄마, 이거 곰돌이야. 허리에 손 올린 의기양양한 곰돌이. 아니면 구름." 


연짱이는 곰돌이 아니면 구름 모양 틀이라고, 엄청 귀엽다고. 그거 곰돌이도 아니고, 구름도 아니다. 생강이다, 연짱이. 


위의 생강 모양 -- 이라고 말하고 곰돌이 혹은 구름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생강빵 모양이 하트 모양. 이 하트 모양이 또 구워놓으면 생각보다 예쁘더라. 


금속 틀. 

17, 18세기 금속 틀이었다면, 스테인레스 아닌 무쇠였을 것 같고, 그러니 무겁기도 무거웠을 것이고, 녹도 잘 슬었을텐데 관리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자주 사용해서 녹 슬 새가 없었을까? 


금속 틀과 나무 틀이 섞여 있다. 그래도 생강 계피향 도는 생강빵에는 나무 틀이지. 나무 틀이 깊은 걸 보니 이 틀로 만든 생강빵은 두께가 두툼할 것이고, 그러면 두 배로 맛있겠지. 


한 땀 한 땀 찍어내는 형태에서 한 번에 여러 개 찍어낼 수 있도록 약간 진화된 가내수공업 생강빵 틀.  한 땀 한 땀보다 아주 조금 나았으려나. 


"엄마, 우리나라 한과 생각 안 나? 뭔가 다식판 같기도 해." 

"그러게. 수제 과자들은 다 비슷한 정서가 있나 보다." 


"어, 엄마, 사람들 로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어. 생강빵 만들기 체험 시작하려나 봐!"  


생강빵 만들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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