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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케나우(BIRKENAU), 무너져내리다 (3)

역사를 잊은 자들의 마지막이 그러하기를 6  

제 2 수용소인 비르케나우(BIRKENAU)까지 무료셔틀을 타고 갔다. 사실 실질적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죽인 곳은 오시비엥침이 아닌 비르케나우였다. 비르케나우는 그래서 별 다른 설명이 없다. 그 넓은 부지를 그냥 걸어다니며 비참함을 느끼는 것 말고는. 


광활하고 황량하고 슬프고 무서운 비르케나우. 


저 굴뚝들을 볼 때 마다 나는 정신적 공황을 느꼈었다. 세월이 흐르기도 하였고 나치가 퇴각할 때 부수기도 하여서 터만 남았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원래 그런 것인지 많은 곳이 보수 중이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연짱이 손을 잡고 한 발 한 발 걷다가 들어왔던 비르케나우 입구를 돌아보았다. 지금이야 차 시간대만 맞추면 사진 속에 보이는 문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만, 당시 비르케나우로 이송되어 수감된 사람들에게 이곳을 나갈 방법은 죽음 뿐이었으니, 비르케나우 들고 나는 문은 사실상 '입'만 있을 뿐 '출'의 기능은 없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비르케나우에서도 오시비엥침에서와 똑같은 일본인들을 목격하였다. 오늘이 무슨 날인걸까, 아니면 그들의 관광 메뉴얼에 이곳은 꼭 들러야 하는 관광명소로 등록되어 있는걸까. 왜 무엇 때문에 하필 나와 연짱이 가는 길에 꼭 그런 이들이. 이 번에는 중늙은이 혹은 노년의 단체 관광객들이었는데, 광활한 비르케나우가 그들에게는 상쾌하게 느껴졌는지 박장대소를 하며 걷고 있었다. 이와 같은 장소에서는 주변 사람들을 의식할만도 한데, 어떤 화제거리이길래 그들은 그리도 유쾌하였을까. 무엇을 기대하고 이곳에 왔는지, 이곳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진심으로 물어보고 싶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몰라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변명일 수 없다. 대중매체가 고도로 발달되어 있는 21세기에 순수한 무지는 그리 흔하지 않다. 더구나 이곳처럼 특별한 의미가 서린 곳까지 품고 온 무지라면, 더더욱 모른다는 것은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오시비엥침에서는 젊은이 둘 때문에 눈에서 불꽃이 튈 정도로 화가 났었는데, 비르케나우에서는 나이 든 일본인 무리에게서 '사고능력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목격하고 참담함이 소름처럼 일었다. 


오시비엥침과 비르케나우 사방을 둘러싸고 옥죄는 철조망을 볼 때 마다, 사람들이 초인 혹은 구원자의 도래를 왜 그렇게 기다리는지 알 것 같은 마음이었다. 그것이 비판이나 반추없는 맹목적 추앙이 되면 제 2, 제 3의 히틀러 같은 미친 독재자가 나오겠지만. 


기차를 타고 가면서 본 폴란드 다른 동네 들판은 영하 추위에도 온통 푸른 초원이었는데, 비르케나우는 노랗게 마른 풀밭이구나. 


지치지도 않는 철조망. 당연히 지금은 철조망에 전기가 통할 리가 없겠지만 무서워서 가까이 가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화장터 설명문. 

이곳 가스실과 화장터는 1943년 3월부터 1944년 11월까지 가동되었다. 1943년 10월 23일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서 이송된 유대여성들이 가스실로 몰이당하는 것에 저항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참고로 베르겐-벨젠은 독일마을 이름이며 안네 프랑크가 죽은 수용소로 알려져 있다. 전쟁 말기 즈음 나치친위대는 오시비엥침에서 행해진 잔학 행위의 증거를 없애기 시작하였고, 1944년 수용소 시설을 파괴하였다. 1945년 1월 20일 남은 시설들을 파괴하기 위하여 다이너마이트가 사용되었다.  


화장터 즉, 수감자 시체 소각시설이다. 그러니까 나치는 이런 시설들을 2차대전 말기 퇴각 전 전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였다는 것이다. 


다 무너져 내려 터만 남은 수용 시설. 인간의 광기가 만든 생지옥도 세월은 못 이긴다. 


"무너져내리다."  

극악함의 끝은 결국 무너져 내리는 허무일 뿐이다. 모든 악한 것들과 악한 행위들의 마지막 종착지가 '무너져내림' 이기를 두 손 모아 바란다. 


희생자 추모비. 


폴란드어로 되어 있는 끝없이 늘어선 추모비석을 보며 걷는 연짱이. 오시비엥침과 비르케나우를 보며 아이는 비참해하였고 눈물을 흘렸으며 분노하였다. 다시는 나의 아래 세대들이 이런 비참함과 분노를 느끼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편히 잠드시길.  


"인면수심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연짱이."   

"엄마, 모든 나쁜 것에 개, 돼지, 짐승 이런 거 갖다 붙이는 게 꼭 맞는 건 아니야. 내셔널지오그래픽 생각해 봐. 다 자란 개체의 동물이 모성애를 발휘해서 종이 다른 어린 동물을 지켜주는 경우도 꽤 많아. 암컷 코끼리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 사자를 보호해주는 걸 봤어. 그리고 정글에서 오랑우탄이 강물 안에 서 있는 사람을 곤경에 처한 것으로 여기고 도움 주려고 손 내미는 것도 봤다고. 이성이 없는 동물도 측은지심은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이 제일 나빠. 아니지, 사람만 나빠." 

"그러게. 이성은 이렇게 써먹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닌데."  


제 2차 세계대전 후 전범으로 붙잡혀 재판을 받은 나치 실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이 그는 나치 조직의 중간 책임자이며, 따라서 그의 나치 행적은 조직 윗선의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인 일이었노라고 스스로를 변호하였던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권리를 억압하는 사회, 정치적 구조악에 대한 저항이 없기 때문이라고 실험을 통해 밝혀낸 바 있다. 즉, 인간의 이성에 내재된 도덕성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사회, 정치적 조직과 구조 안에서 행해지는 부당함과 악에 대한 저항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인간만이 가지는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장 쉽고 가장 타락하였으며 가장 악한 선택을 하는 데 썼다. 그는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를 가진 유일한 이성적 존재' 라는 타이틀을 아주 간단히 진창에 던져넣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1년 1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 이듬해 이스라엘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갱생의 여지가 결여된 인간에게 고통없는 찰나의 죽음은 그들이 맞을 수 있는 가장 자비로운 최후일 것이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칠 만큼 광활한 비르케나우. 먹지도 입지도 못한 채 중노동에 시달리고 병 걸린 사람들이 광활한 비르케나우를 어떻게 걸어갔겠나. 


일정한 간격으로 줄 지어 세워져 있는 감시초소들. 


유럽 다양한 곳에서 살고 있었을 수 많은 유대인들을 비르케나우까지 다이렉트로 실어날랐을 철길. 


철로 침목이 끊어지고 없어진 비르케나우 철길. 그리고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는 감시자 없는 감시초소. 이곳에 앉아 수감자들을 감시하였던 나치친위대 소속 병사는 빛나는 철길은 녹슬고, 철길을 버텨주던 침목은 삭아 없어지는 어느 날이 올 것이라 단 한 번 생각해 본 적 없었겠지. 생각이나 자각이 있으면 단 한 순간도 버티지 못하였을 것 같은 수감자들과 생각도 자각도 없이 조직의 지시에 충성하며 하루를 살아갔을 나치친위대원과. 감당할 수 없는 고난에 살았을 누군가에게도, 승리감에 도취되어 살았을 또 다른 이에게도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 만큼 공평한 것은 없을 것이다. 


정말 광활한 비르케나우. 


"연짱이, 어느 방문객이 여기 꽂아놓은 걸까, 아니면 오시비엥침 직원들이 이렇게 해놓은 걸까." 

"오시비엥침 직원들이 그랬겠지만, 어느 개념 있고 마음 따뜻한 방문객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할래, 엄마."  


아직 덜 어른 연짱이도 아는 것을 몰랐던 수 많은 어른들. 


비르케나우 수감동을 한 번 더 눈에 담고 돌아나왔다.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 . .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나치즘의 광기로든 무엇이든 우리에게 악을 행하도록 하는 계기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은 생각하는 것 뿐이다" 라고 말하였다. 역지사지를 잊고 사고를 멈춘 21세기의 머리 굳은 아이히만들에게 이곳이 사고 기능을 다시 작동시켜 생각 무능의 지옥을 벗어나게 하는 갱생 가능성의 희망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나는 어쩌면 안일한 이상주의자인지도 모르겠다. 오시비엥침과 비르케나우에서 일본인들의 행태를 목격하고도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싶어지는 것을 보면. 


부디, 순하고 선한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진실은 묻을 수도, 묻힐 수도 없다는 것이 당연한 진리로 빛나는 곳이기를 또한 마음 깊이 바라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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