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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비엥침(OŚWIĘCIM), 무너져내리다 (1)

오시비엥침, 침묵은 동조의 다른 말 4 

나는 거의 널 사랑할 뻔 하였지 

하지만 침묵의 돌을 

네게 던졌을 것이라는 걸 나는 안다.

나는 교활하게 훔쳐보는 자 


                                      '처벌' 중 (BY 셰이머스 히니) 


I ALMOST LOVE YOU  

BUT WOULD HAVE CAST, I KNOW, 

THE STONES OF SILENCE. 

I AM THE ARTFUL VOYEUR   

                                               FROM 'PUNISHMENT'  (by S. HEANEY)  



옆집 작은 '안네'는 유대인이라는 죄목으로 무참히 살해되었다. 

사랑할 뻔 한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다. 

사랑한 것도 동정한 것도 아무 것도. 

또한 행위가 따르지 않은 사랑과 동정은 아무런 힘이 없다.  

"GOODBYE, JEWS" 를 외치며 돌을 던진 자들, 유죄. 

곁눈질로 '훔쳐보기' 하였던 교활한 공모자들, 유죄. 

그리고 '침묵' 으로 소극적 돌을 던진 공모자들, 유죄. 

전부 유죄. 


감정이입이 극도로 잘 되는 염개미가 여행계획을 짜면서 가장 피하고 싶었던 곳이었다. 정말이지 어떡해서든 피하고 싶었다. 버스에서부터 계속 이를 악물고 간 탓에 오시비엥침을 돌아보는 내내 턱이 아팠다. 



오시비엥침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던 설명문. 

1940년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으로 나치친위대(SCHUTZSTAFFEL 줄여서 SS) 는 오시비엥침의 전 폴란드군 주둔지를 징발하였다. 오시비엥침은 1939년 폴란드 패전 후 독일군이 이미 장악하고 있었던 곳이다. 나치친위대가 이곳에 세운 강제수용소는 이후 아우슈비츠 1 로 불렸다. 수감자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처음에는 대부분 폴란드 인이었으나, 이후 유대인과 다른 이들 -- 아마도 집시, 장애인과 정치범들 -- 또한 보내졌다. 특정 기간 동안에는 여성과 소련 전쟁포로들이 보내지기도 하였다. 나치친위대 사령관 사무실과 나치친위대 사무실 역시 이곳에 있었으며, 이후 강제수용소 단지의 확장은 이곳에서 지휘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독일이 베르사유조약을 어기고 폴란드 그단스크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미리 출력하여 들고 간 입장권을 제시하고 나오면 바로 보이는 오시비엥침 입구 풍경이다. 날씨가 흐리지도 화창하지도 않은 날이었는데 가슴이 선득선득할 정도로 음울하고 서글픈 공간이었다. 


나치가 퇴각하면서 다 부숴서 강제수용소의 극히 일부만 남아있는 것인데도 그 규모가. 걷는 내내 소름이 가시지 않았다. 


80년이나 지난 현재, 과거역사를 다 알고 걸어도 없던 공황장애가 생길 지경인데, 그 당시에는 어땠을지 공포심으로 숨이 막혔다. 들어온 사람은 무조건 비참하고 잔혹하게 죽어나가는 공간이었으니. 


그 유명한 문구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죽을 때까지 일하다가 죽은 영혼이나 자유롭게 나가라는 말이지. 전범 개인이든 전범 국가든 피해자 개인이나 피해 국가가 당했던 것과 아주 똑같이 돌려줘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나쁜 짓 하는 것들은 저희들 하는 짓거리가 나쁜 짓이라는 자각 자체가 없으니 당연히 반성도 없는거다.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썩게 한다거나 돈으로 갚게 한다는 건 그런 가해자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정신적으로 깨달을 능력 미달인 것들은 육체적으로 똑같이 괴롭게 해줘야 최소한 피해자들이 당했던 괴로움을 일말이라도 알지. 돌아보는 내내 너무 무섭고 슬펐다가 울화가 정말이지 들불처럼 치밀었다. 


독일어와 폴란드어 병기된 "멈춰(STOP)" 사인이다. 멈추지 않으면 바로 죽음이라는 의미. 감시초소에 철조망에 탈출시도라도 하다가 걸리는 날에는 탈출시도자 가족 뿐 아니라 도와준 이까지 모두 끌려와 가스실 행인 서슬퍼런 살의로도 모자랐던 걸까. 


순수 난방용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굴뚝은 또 얼마나 많던지, 이곳에 계속 있으면 '굴뚝공포증(CHIMNEY-PHOBIA)' 같은 게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탈옥시도 중 붙잡힌 수감자의 시신은 본보기로 전시되었다고. 독일이나 일본이나 잔혹한 짓의 성질과 행태는 어찌 그리도 똑같았을까. 우리 민족에게 행한 작태를 보면 일본이 더 나쁘면 나빴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제노역하러 오고 가는 길에 발 맞춰 가면 이탈자가 있는지 빈 자리는 없는지 잘 보이니 연주했다는 오케스트라. 


철조망 만큼이나 지긋지긋하게 많았던 감시초소. 


1941년 10월 7일 오시비엥침에 소련 전쟁포로 전용 수용소가 세워졌다. 약 1만명이 1, 2, 3, 12, 13, 14, 22, 23, 24 블럭(수감동)에 수감되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게슈타포의 명령으로 가스실에서 죽거나 총살되었다. 노동을 거부하는 포로들은 혹한의 날씨에 발가벗겨진 채 수감동에서 내쫓겨 물을 뒤집어쓰고 얼어죽었다. 1942년 3월 즈음, 그러니까 수감된 지 5개월 안에 9천명이 죽었다. 애초 수감인원은 만명.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은 새로 지어졌던 비르케나우로 이소되었다. 비르케나우는 짐승 우리만도 못한 수감시설과 가스실 그리고 소각장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오시비엥침도 그렇지만 비르케나우 역시 생존 가능성 거의 0%에 수렴되는 곳이니 결론은 다 죽었다는 거다.  


참 유럽 다양한 곳에서 골고루도 데려왔네. 폴란드 내 여러 도시들에는 유대인들을 비르케나우까지 다이렉트로 실어나르는 철도가 놓여있다. 


"유대인들은 완전히 몰살되어야만 하는 민족이다." 

어느 미친 놈이 지도자가 되어 절대 권력을 쥐고서 맨 앞 주어만 저 원하는 대로 바꿔놓으면,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집단에게든 적용시킬 수 있는 말 아닌가. 나치에 대한 열렬한 동조 혹은 외면이나 침묵으로 소극적 동조를 표현하였던 독일인들은 이 문구가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에게도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정말 아무도 하지 않았을까. 그저 한 국가 또는 한 민족의 집단광기라고 서둘러 매듭짓기에는 지나치게 무서운 문구가 아닐 수 없다. 사진 찍는 순간 등줄기 오싹한 소름 때문에 손이 떨렸었나 보다. 


폴란드 각 도시에서 비르케나우까지 다이렉트로 실려왔을 유대인들. 1944년이면 2차대전 막바지라서 

선별과정 따위 생략된 채 실려온 유대인들은 전부 가스실로 바로 보내졌을 것이다. 사람들 옆 철로가 소름끼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어날랐겠냐고. 


아우슈비츠(오시비엥침)로 강제이송된 유대인들은 비르케나우에 있는 특별 철로 진입로에 도착한 후 사진 속 진입로에서 여성과 어린이는 남성과 분리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나치친위대 의사들의 선별작업을 통해 노동에 적합하다고 간주된 이들은 강제수용소로 바로 보내졌는데, 전체 도착한 이들의 약 25퍼센트에 이르는 숫자였다. 나머지, 그러니까 비르케나우에 실려온 전체 인원의 75퍼센트는 가스실로. 사형판정을 받은 사람들 즉, 노동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은 나머지 75퍼센트의 패닉확산을 막기 위해 -- 공포 때문에 통제가 힘들면 귀찮으니까 -- 소독용도로 샤워하러 가는 것이라 안심시켰다. 가끔 실려온 전 인원이 선별작업없이 바로 가스실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죽음으로 가는 길 위에서" 

비르케나우의 가스실로 바로 보내졌던 애기들, 어린이들 그리고 여자들. 부모를 골라 태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이 무슨 짓이냐고. 


비극의 무게를 가슴에 기꺼이 새기려는 수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느라 닳아서 낮아진 계단. 


여성수감동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마음이 너무 피폐하고 비참해져서 들어가길 망설였더니 연짱이는 그럴거면 왜 왔느냐고.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덮어두고 싶었던 곳이라 그렇다, 연짱이. 


1942년 3월 26일부터 그 해 8월 중순까지 오시비엥침 1부터 10 수감동은 여성수감자용 수용소로 사용되었으며, 높은 담으로 남성수용소와 분리되었다. 독일과 유럽 전역의 독일점령지에서 이송된 유대인 여성 혹은 비유대인 여성 약 1만 7천명이 수감되었고, 4달 동안 굶주림, 전염병, 위생시설 부족, 그리고 중노동의 결과 가스실로 보내지거나 죽었다. 1942년 살아남았던 이들은 비르케나우의 새 여성 수용소 B1 으로 이소되었다. 


그 열악한 곳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으면 뭐하겠냐고. 비르케나우로 이송된다는 것은 죽는다는 말에 다름 아니니 굶어죽든, 위생 따위 개나줘버린 수용소여서 여성질병에 걸려죽든, 중노동에 죽든, 그것도 아니면 가스실로 보내졌든 아무튼 다 죽었다는 말이다. 


나는 평소 육두문자는 물론 욕도 거의 안 하는 편이다. 그런데 오시비엥침과 비르케나우에서 평생 해도 다 못할 온갖 욕이란 욕은 다 하고 온 것 같다. 일자리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것이라고 나치가 거짓말하여 끌고 온 사람들이 가져온 일상용품들 중 그릇들만 모아놓은 거다. 산 같이 쌓여있는 그릇들 중 매우 일부만 찍은 것이 이렇다. 이 물건들의 주인들은 가스실에서 바로 죽었거나 노동가능 인구로 분류되어 당장은 죽지 않았다고 해도 결국 다 죽었을 것이다. 


옷이나 일상용품들을 넣어왔을 가방들 속에 아무렇게나 끼어있는 뚜껑 없는 바구니들을 보고, 나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펑펑 울었다. 말그대로 시장에 장보러 갈 때 주부의 손에 어제 그제와 다를 것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렸을 장바구니였을지 모른다. 정치도 이슈도 이념도 권력도 광기도 그 무엇과도 상관 없이 그저 가족의 먹을거리가 오롯이 담겼을 주부의 장바구니. 유대인이어서 또는 유대인을 도와준 가족이어서 주인이 이 곳에 끌려와 수용되거나 가스실에서 죽지 않았더라면, 수명을 다 할 때까지 주인 손에 들려 먹을거리를 담아 나르며 까만 손 때로 반들했을텐데. 바구니 위에 부옇게 내려앉은 주인 잃은 세월이 서러웠다. 


장바구니를 보고 돌아나오다가 유리장 속에 진열된 이 애기옷을 보고 나는 오열하였다. 엄마 혹은 할머니의 손에 정성껏 기워진 어린 아이의 양말과 셔츠, 면속옷이었다. 옷과 양말을 기워입히고 해진 신을 신길 만큼 없는 살림이었겠으나, 아이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곱고 음전한 바느질 솜씨가 보여주듯 유대인이라고 덜 했겠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하고 어여쁜 자식인 것은 유대인이나, 독일인이나, 나와 같은 유색 아시아인이나 다 똑같은 건데, 정성을 다해 기워입힌 옷을 입은 어여쁜 아이는 유대인이어서 끌려와 노동 인구에 분류될 수 없는 어린아이라서 가스실에서 바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엄마, 울지마." 


내 어깨를 잡는 연짱이의 손을 보니 정말이지 눈물이 멈추지도 않고 하염없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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