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오시비엥침(OŚWIĘCIM), 무너져내리다 (2)

웃음이 나오는구나, 이런 곳에서 5 

"엄마는 마음이 잘 안 추스려져, 연짱이. 이런 곳인 줄 이미 알고 왔지만 마음도 발길도 안 떨어져."  

"그래도 엄마, 눈물 닦고 더 가보자. 아직 많이 남았는데, 여기서 너무 많이 울면 진 빠져서 비르케나우는 가지도 못해." 


수감자들의 생활을 볼 수 있는 제 6 수감동. 


1943년 봄까지 나치는 거의 모든 아우슈비츠(오시비엥침) 수감자들을 식별하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독일인이거나 다른 나라 국적자들만 사진을 찍었다고. 이 사진 속 사람들은 독일인이거나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1943년 무렵이면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어서 일제나 나치나 온갖 발악을 하던 때라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 중 가장 혹독한 문화말살정책을 겪을 때였을 것이고, 나치 역시 강력한 인종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대량학살을 위해 너무 많은 수의 유대인들을 세계 여기 저기에서 잡아오던 때여서, 그 수가 너무 많아 유대인들 사진은 찍지 않았다고.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나치친위대는 10 수감동과 11 수감동 사이 뒤뜰 담벽에서 수 천명의 사람들을 사살하였다. 이곳에서 처형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폴란드 정치범들이었는데, 특히 비밀조직의 수장이거나 일원, 탈출을 도왔거나 외부와 접촉하게 해준 이들이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인근 마을의 폴란드 사람들 역시 이곳에서 총살되었는데, 독일점령에 대항하여 저항활동을 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인질로 끌려온 남성 여성 심지어 어린이도 있었다. 유대인과 소련 전쟁포로 포함 다른 국적 다른 민족 수감자들 역시 가끔 이곳에서 사살되었다. 나치친위대는 이곳에서 가혹한 처벌을 집행하기도 하였는데, 고문 방법은 못 쓰겠다. 일제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분들에게 가한 고문이 이보다 더하면 더하였지 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여러 문서를 통해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더 가혹한 고문 유형을 알고 있다고 해서 고문에 대해 무뎌지는 것은 아니니 괴롭고 육두문자 나오고. 이 처형담벽은 1944년 강제수용소 지휘부의 명령으로 없어졌고, 이후의 처형은 다른 곳, 그러니까 대부분 비르케나우 가스실과 화장터에서 이루어졌다. 전후 처형담벽은 박물관측에서 부분적으로 재현해놓은 것이다. 


"당신은 지금 나치친위대가 수 천명의 사람들을 살해하였던 뒤뜰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정숙해주십시오. 

 그들의 고통을 기억해주시고 (아픈) 기억을 존중해주십시오."  


사실 이 강제수용소 공간 자체가 이런 부연 설명이 필요없는 공간 아닌가. 여기서는 수 천명이 사살되었지만 오시비엥침 전체, 그리고 비르케나우 전체에서 죽은 수감자들이 얼만데. 


수감자 사살장소인 뒤뜰 담벽. 

영화 'LIFE IS BEAUTIFUL' 에서 주인공 귀도 역시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원래는 그냥 벽이었을 공간인데 박물관 측에서 방문객들 보라고 추모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내가 '굳이' 위에서 따옴표 안에 '굳이' 처형담벽에 대한 환기의 말을 '굳이' 번역을 한 이유가 있다. 이 사진은 솔직히 멀리 어둡게 찍혀서 처형대 앞 두 사람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게 저 두 사람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다. 말하자면 폴란드 애국지사들이나 그 가족들을 총살하였던 처형장소인데, 젊은 두 사람이 웃으며 내 앞을 지나치더니 처형장소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수 많은 언어들 중 일본어를 분명히 구분해 낼 수 있는 내 귀가 이 때 만큼은 전혀 편리하지 않았다. 이곳을 방문한 어떤 관광객도 처형대 앞에서 기념촬영 따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기념촬영을 하며 서로 쳐다보고 뭐가 그리 좋은지 웃는다. 나는 이곳 사진 찍는 것도 죄스러워서 심장이 조이는 것 같던데. 


11 수감동에 대한 설명. 

염개미와 연짱이가 오시비엥침 전체 공간에서 가장 무서웠던 두 공간 중 하나가 11 수감동이었다. 세세히 번역을 하자니 너무 길고 너무 무서워서 간략히 설명을 하자면, 오시비엥침 11 수감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감옥' 역할이다. 사실 오시비엥침은 수감자들의 수감보다는 강제수용소 지도부의 본부나 감옥 실험실의 역할이 더 컸다고. 이 오시비엥침 감옥에는 탈출을 시도하거나 폭동을 준비하거나 외부와의 접촉을 계획하는 등의 비밀활동을 하였다고, 수용소 게슈타포에게 의심을 받는 사람들이 수감되었다. 또한 수감자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외부 폴란드 사람들 역시 끌려와 수감되었으며, 수감자 모두 잔혹한 심문 후 대부분 총살되었다. 수용소 초창기에는 징벌부대와 재교육부대가 이곳에 있었다. 보내진 사람들 거의 모두가 유대인 남성이거나 폴란드 신부였으며, 도착하자마자 가장 등골 휘는 중노동을 할당받았고, 대부분 죽었다. 시체 소각을 위해 수감자부대를 수용하였던 적도 있었다고. 벙커로 알려진 지하실에는 징벌감방이 있는데, 수용소 규칙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나치친위대가 수감자를 가두었으며, 1941년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수감자들을 이곳에서 굶겨죽이기도 하였다. 또한 유대인 대량살상을 위해 자이클론 비(ZYKLON B)를 이곳에서 실험하였는데, 실험용 쥐로 선택된 600명의 소련 전쟁포로와 250명의 폴란드 정치범이 이곳에서 살해되었다. 


내가 너무 무서워서 덜덜 떨며 들어가지 못하고 있으니 연짱이가 내 손을 끌고 들어갔는데,  지하 벙커 징벌감방의 비참함이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유대인들의 탈출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수감된 폴란드 신부님이 갇혔던 징벌감방은 말이 좋아 감방이지, 그냥 위 아래 사방팔방 다 막아놓은 시멘트 굴뚝이었다. 일반 체격의 성인 남성은 말 할 것도 없고, 나처럼 체구 작은 여성조차도 똑바로 서지도 앉지도 숨쉬지도 못하는 굴뚝. 다른 것들도 있었는데, 염개미는 패닉에 공황상태여서 사진은 커녕 똑바로 걸어나온 게 다행일 정도였다. 일제가 우리 독립운동가분들 고문하느라 가둬놓은 바늘 박힌 관은 그보다 더 하였지만, 눈으로 보는 것과 문서로 읽는 것은 달라서. 연짱이 손을 잡고 그곳을 빠져나와서야 겨우 숨통이 트였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감시초소과 멈추지 않으면 죽인다는 푯말. 사람이 왜 사람일까, 한없이 수 없이 생각하게 한 모습들이었다. 


지치지도 않는 감시초소들. 


이 감시초소는 나치친위대 병사가 날 궂은 날 수감자들 숫자 세고 감시하려고 만들어놓은 것이다. 돌아보는 중 날씨가 점점 흐려졌다. 마음은 더 흐리고 고통스러웠다. 


연짱이 손 꼭 잡고 오시비엥침 구석구석을 걸어다녔다. 


오시비엥침 구석 구석. 나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종류의 괴로움이라. 


가스실. 

아, 위의 11 수감동과 함께 나와 연짱이가 가장 무서워했던 곳이 이곳이다. 들어가면 그냥 죽어나오는 곳. 이곳 역시 들어가자마자 내가 패닉에 공황상태인데다 너무 비참하여 차마 사진을 찍지 못하였는데, 당시 독일여자들은 유독 긴 머리타래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가스실에서 죽은 여자들 머리카락을 잘라다 직조공장에 넘기는 일이 흔했다고 하였다. 그런 일들을 몇몇 의사들(전문업자들?)이 하였다는데, 시체에서 금니를 채취하는 일도 함께 하였다고. 히틀러에게 열광하였던 그 당시 독일여자들이 자신들의 머리카락에 덧붙이는 그 수 많은 머리타래의 출처를 한 점 생각도, 의심도 해 보는 일 없이 걸쳤다는 것을 매사 의심 많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모두 함께 히틀러의 광기에 휩쓸려서, 자신들도 그 광기의 일부가 되어, 그녀들은 해 질 녘 마련된 무대 위 연출된 히틀러의 거짓 카리스마에 그저 숨 넘어가도록 열광만 하였을까. 보여주고 들려주는 대로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매하고 소름끼치는 일인지 어찌 그리도 자각하지 못했을까. 그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혹여 비뚤어지고 잘못된 신념은 아닐지 그들이 반추 한 번 쯤만 해봤어도. 내가 믿는 신념이 잘못된 것일까봐, 나는 살면서 그게 가장 무섭던데. 그래서 뒤돌아보고, 내가 가는 방향이 올바른지 의심하고, 반추하고 그렇게 되던데. 가장 경계하는 것도 그것이고.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우리 한민족에게 돌을 던진 자들만 유죄인 것은 아니다. 작은 '안네' 를, 여린 '위안부 소녀'를 죽이고 유린하였다는 사실을 알면서, 혹은 관심이 없어 몰라서, 방관하고 지켜보기만 하였거나 침묵하였던 자들 역시 직접 돌을 던진 자들에 동조한 공모자들이라는 혐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수 없이 많았던 가스실의 위치와 구조를 설명해 놓았다. 정말이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럽고 괴로웠다. 


제 2 수용소 비르케나우로 향하였다. 

이전 04화 오시비엥침(OŚWIĘCIM), 무너져내리다 (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