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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2), 흐린 약국의 도시

약국박물관, 뱀과 재탄생의 신화, 그리고 이론과 현실의 괴리 2

내게 우치는 사실 패브릭의 도시가 아닌 약국박물관의 도시로 기억된다. 그것은 약국박물관이 우치의 관광명소(TOURIST ATTRACTION) 1번이라서가 아니라 출국 거의 직전 여행 계획서에 우치를 넣는 바람에 그만큼 우치를 잘 모르고 갔기 때문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규모나 역사적 의의 면에서 보다 앞서는 크라쿠프 약국박물관이 아닌 우치의 약국박물관이 훨씬 좋았다. 그저 내가 쉽게 소화할 수 있을 만큼의 아기자기한 규모가 좋았고, 덧붙여지는 조근조근한 설명이 또한 좋았다. 그게 우치하면 약국박물관부터 떠올리게 된 이유라면 이유였다. 


약국박물관은 메인거리 피오트르코프스카(PIOTRKOWSKA)의 자유광장(LIBERTY SQUARE)에 위치해있다. 건물 외벽에 붙은 약국박물관 표지를 확인한 뒤 무거운 문을 힘들게 열고 들어가니 뱍물관 지킴이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문 닫았다고. 연짱이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더니 할아버지가 위층에 대고 누군가를 부르신다. 아마도 점심시간이라 지금 안 한다고 말하고 싶으셨던 듯. 다행히 점심시간이 거의 다 끝나는 시간이어서 웬 오빠가 내려왔는데, 머리카락 벗겨진 두피까지 온통 새하얀 오빠였다. 넓지도 크지도 않은 박물관에서 새하얀 큐레이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 옹골차고도 조근조근하게 폴란드 약국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우치 약학대학의 역사가 크라쿠프 다음으로 오래 되었으며, 여성들의 참정권이 없던 시절 우치 첫 약대생 언니들이 배출되었다고. 그러면서 곁 역사로 동유럽의 여성 참정권 역사는 매우 짧다는 설명까지. 동유럽 뿐 아니라 서양의 여성 참정권 역사는 길지 않다. 염개미와 연짱이가 좋아하는 '메리 포핀즈'(줄리 앤드류스 버전)에도 여성참정권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을 정도니까. 하얀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면서 "여성에게 투표를(VOTE FOR WOMEN)!" 을 외치며 뱅크스 부인이 들고 다니던 피켓이 떠올랐다. 윗 세대가 그렇게 어렵게 얻어낸 투표권을 귀한 줄 모르고 참 함부로 여기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무관심으로 인한 무지와 침묵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제 2, 제 3의 히틀러 같은 괴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음에도. 


폴란드 어로 약국(PHARMACY)은 '압테카(APTEKA).' 흠 . . . 영어와는 전혀 모르겠고 독어와는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선입견인지 몰라도 약국박물관이 있어서 그런지 우츠와 크라쿠프에는 유독 약국이 많았던 것 같다. 두 도시 모두 완전 주택단지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거리에 거의 한 집 걸러 하나씩 약국이 있었다. 


약을 넣어두었던 도자기 그릇들. 올망졸망 예쁘기도 하지요. 아마도 가루약을 만드는 하얀 약사발과 절구공이들이 단정하다. 


어릴 때 염개미는 왜 그런지 매우 병약한 아이여서 병원냄새에 익숙할 만큼 병원 출입이 잦았었다. 지금이야 병원과 약국이 분리되어 있지만, 1990년대 초, 중반까지만 해도 병원 의사선생님이 약도 같이 처방해주셨던 터라 병원에서 저런 모양의 절구공이와 가루약 만드는 사발은 흔히 볼 수 있는 도구들이었다. 순전히 하얀 절구공이와 약사발이 예뻐서 현실감 전혀 없던 국딩시절 나는 약사선생님이 되고 싶었었다. 그러다가 중딩이 되어서 그것이 실현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상 -- 지금의 물리와 화학 -- 을 못해도 보통 못하는 수준이 아니어서. 물리 만큼 화학도 수학도 못하는 내게 이과계열의 과목이나 학과는 너무도 요원한 분야였다. 에이구. 


아마도 물약을 담아두었을 불투명 혹은 투명 유리병. 저울 봐라.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나는 저래 단정하게 열 맞춰 잘 정리된 무언가를 보면 좋아서 가슴이 뛴다. 우치 약국박물관을 돌아보는 내내 그랬다. 흐트러진 구석 하나 없이 아주 제대로 정리된 박물관 집기들 자체가 내게는 찡한 감동이었다. 크, 저렇게 해놓고 살아야 되는데. 


새하얀 큐레이터의 설명에 따르면, 니베아크림이 처음에는 약국에서 판매되었고, 커피로 유명한 네슬레 제품들도 첫 시작은 약국에서부터였으며, 세계 최초 인스턴트 커피를 판매한 회사 역시 네슬레라고. 


커피의 역사는 약국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포스터들. 카페인의 각성제 효과 때문인걸까. 염개미는 과테말라보다 좀 더 산미가 있는 에티오피아나 예가체프를 선호합니다. 


커피는 약국에서 처음 판매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느라 약국박물관에 붙어 있는 또 다른 포스터들. 인스턴트 커피는 네슬레인가요. 호, 일찍 일어나는 새는 벌레 말고 커피를 마시는가 보다.  


17세기에 쓰여진 책이라고 하얀 큐레이터가 설명해주었다. 


"오빠, 17세기에 쓰여진 글인데 오빠는 이 책을 현재 폴란드 책 읽듯 줄줄 읽을 수 있어요?"

"???" 

"나는 우리나라 고서를 그렇게 줄줄 못 읽거든요. 말이 지금하고 많이 달라서."  

"아, 그럼요. 고서라서 나도 줄줄 읽지 못해요." 


그저 글자를 읽고 싶은 마음에 필터에서 한 번 걸러내지 못하고 튀어나온 정말 멍청한 질문이었다. 


약학 고서들. 아, 책표지라도 읽고 싶다. 


식물 중 약초를 구분하여 채취하거나 재배하여 병을 치료한 것은 동서양 동일하구나. 지금이야 양방, 한방 나뉘고 화학약품을 정제하여 약을 만들어내지만, 중세, 근대까지만 해도 굳이 한방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약재는 자연에서 얻었을테니. 꽈리도 보이고 뭔가 쑥종류로 보이는 것도 있다. 이 약초 섹션에서는 뭔가 화하고 잘 마른 냄새가 났고, 볕 속에 떠도는 먼지까지도 단정하고 고즈넉한 게 한없이 좋아서, 한참을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약국 관련 증서와 패였을걸. 


참 뜬금없게도 염개미로 하여금 약사를 꿈꾸게 하였던 약사발과 절구공이. 사진 액자들 열 맞춰 배열된 것 봐라. 


절구와 절구공이들이며 모양 맞지 않는 냄비들도 저 정도면 잘 정리해둔 거다. 와, 각 잡혀 진열된 용기들하며. 저렇게 해놓고 살아야 돼.  


옛날 몰핀 담긴 앰플이다. 연짱이는 큐레이터에게서 몰핀 앰플이라는 말을 듣고 열광하였는데, 애거서 크리스티 할머니 추리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독극물이 몰핀이어서. 연짱이는 애거서 크리스티 광팬이다. 


"엄마, 엄마, 이거 몰핀이래." 

"그러게." 

"와, 그냥 딱 봐도 몰핀이잖아. 애거서 크리스티 할머니 추리소설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약품이 몰핀하고 청산가린데, 지금 내가 몰핀을 보고 있는 거라고!" 


연짱이가 몰핀을 보고 너무 열광을 하니 하얀 큐레이터 오빠는 몹시 당황하였다. 아이가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 광이라 그렇다고 설명을 해주었지만, 딱히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워, 연짱이, 들었지. 저 왼쪽 아래 비타민 앰플이래." 

"엄마 하얘지라고 얼굴에 바르는 그거?" 

"어, 그거. 와, 저 시절에도 비타민 앰플이 다 있었네. 그 때는 얼굴에 바르는 용도가 아니라 주사 용도였으려나?" 


얼굴 하얗게 만들어주는 비타민 앰플을 보고 내가 2차 열광을 하니, 하얀 큐레이터는 그냥 조용히 체념하였다. 극성맞은 모녀라 죄송합니다. 


약이 담긴 잔을 휘감고 올라가는 뱀이 표현된 약국박물관 로고. 

왜 뱀일까, 궁금해하니 큐레이터가 설명해주기를, 뱀은 탈피를 하는 동물이라 그 과정에서 모든 질병을 떨군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한다고. 서양 원시신화 속 뱀은 허물을 벗고 새롭게 젊음을 얻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재탄생의 신비를 관장하는 존재라고 믿어졌다. 성서의 엄격하게 부권적인 체계에서 뱀은 원죄의 상징이지만, 원시신화 속 뱀은 세계의 나무를 수호하는 생명과 탄생, 물의 주관자이다. 질병을 치료하여 생명을 살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 약이라고 생각한다면, 약국박물관의 로고가 뱀인 이유는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이론 속의 뱀은 충분히 멋지고 매력적이지만, 실제 꼬리를 차르르, 흔들며 곳곳이 서서 위협하는 방울뱀이나 얼굴이 세모꼴인 거뭇거뭇 살모사를 보면 매력적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쏙, 들어간다. 아, 이런 이론과 실제의 극복할 수 없을 만큼 큰 간극이라니. 


연짱이가 방 전경을 찍으려고 하니 오빠가 얼른 비키길래 그냥 거기 있어줘요, 하고 찍었다. 우치 약국박물관을 빛나게 해 준 하얀 큐레이터 오빠, 고마웠어요. 만수무강하소서. 


오른쪽 불 들어와 있는 1층이 약국박물관이다. 


우치 약국박물관 입구. 출입문을 약간 힘차게 열고 들어가야 한다. 


약국박물관에서 나와 '하수도박물관(DĘTKA 뎅트카)' 을 가보려고 표지판을 찾고 있는데, 웬 커플이 불쑥 나타나서는 도와줄까, 하며 눈을 반짝였다. 수염만 길렀을 뿐 연짱이 또래로 보이는 오빠는 외국인에게 배운 영어를 써먹고 싶어하는 테가 역력하였다. 오빠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몹시 부담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도와주겠다는 사람의 기대를 허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하수도박물관' 을 찾는다고 하니 못 알아듣는다. '뎅트카' 라는 편한 폴란드 말을 까맣게 잊고 'MUSEUM OF SEWER,' 'SEWAGE,' 'FOUL DRAIN' 이라고 물었더니 못 알아들어서, 'WASTE WATER' 라고 조금 다르게 설명을 하였더니 대번에 "아, 뎅트카" 하며 알아듣는다. 뎅트카는 길을 건너가야 나온다고 일러주었는데, 어째 그 모습이 내 눈에는 초행길에 곤경에 빠진 외국인의 문제를 해결해주어 한껏 으쓱해진 어깨를 여자친구에게 뽐내는 것으로 보였다. 귀여운 커플이었다. 하지만 그가 알려준대로 길을 건너 열심히 걸었는데도 박물관은 보이지도 나오지도 않았다. 연짱이가 데이터를 켜고 구글맵을 연결하였지만, 어쩐지 점점 더 뎅트카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고. 그냥 맞은편 보이는 건물이 뎅트카라고 명료하게 알려주었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이제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내게 연짱이는 어제 눈여겨 봐뒀던 퐁첵집을 가보자고 하였는데, 퐁첵과 함께 커피도 팔고 있어서 둘 다 사들고 메인거리(PIOTRKOWSKA)를 걸었다. 퐁첵은 마누팍투라 INFO 옆집 '퐁츠카르니아' 퐁첵처럼 달지 않고 식감도 훨씬 좋다고. 커피는 사약이었다. 


흐린 우치는 그 나름 운치가 있었다. 어제보다 바람 더 많이 불고 기온도 뚝 떨어져 추웠지만, 그건 입성 선택을 잘못한 내 탓이었을 뿐 겨울에 추운 건 당연하고, 더구나 이곳은 겨울나라인 것을. 이제는 많이 커서 엄마보다 문제해결능력이 월등하고 시야도 넓어진 아이와 함께 이국의 풍경 속을 도란도란 걷는 감회는 그저 훌륭하다거나 새삼스럽다고 단 한 두 마디로 표현할 만큼 간단하지는 않다. 복잡미묘하고 매우 다양한 색감과 질감의 감정 감회여서. 15년 동안 가장 좋은 길동무였고, 이제는 그 위에 든든한 여행동반자 역할까지 확실하게 해주는 딸이라는 것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였다. 잘 키우도록 내게 양육 맡겨진 아이이니 최선을 다해 잘 키워야 한다고 믿어왔지만, 스무해 다 되도록 오히려 아이를 통해 배우고 깨달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니, 사실 '양육' 이라는 말은 아이 아닌 내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아이와 함께 걷는 우치의 쨍하도록 청량한 대기에 가슴이 벅찼다. 




우치 약국박물관에 관해 좀 더 첨언하자면. 

오래된 건물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이 약국박물관은 1839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우치에서는 엄청 유명한 건축가 구스타브 란다우-구텐테게르(GUSTAW LANDAU-GUTENTEGER)가 재건축하였다고. 역사 있는 약국박물관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비엔나공방에서 온 가구나 무쇠절구, 18, 19세기식 내부장식 역시 훌륭하다. 전시물 일부는 우치 약국박물관과 결연관계에 있는 크라쿠프 야기엘론대학교 약국박물관에서 빌어온 것이다. 


사실 우치 약국박물관의 기억이 워낙 좋아서, 이후 들렀던 크라쿠프에서도 우리는 당연한 듯 약국박물관을 방문하였다. 아무래도 야기엘론대학교가 있는 도시여서 그러한지 박물관 규모나 전시물은 크라쿠프가 압도적으로 훌륭하였으나, 우치에서와 같은 살뜰하고 조근조근한 큐레이터의 설명은 없었다. 그저 관람도 하기 전 먼저 활자로 질식시킬 작정을 한 것 같은 꽤 여러 장의 깨알 글씨 팜플렛을 손에 쥐어주고 관람순서를 일러준 것이 그곳 큐레이터가 한 일의 전부였다. 폴란드에서 가장 전통있는 약학대학이 크라쿠프에 있으니 보다 학문적이고 꼼꼼한 관람을 유도하는 것이 크라쿠프 약국박물관의 의도인 것 같았지만, 약간 학구열에 불타는 관람객 염개미에게 조차 그런 의도가 좀 아니 많이 부담되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학구열을 불태우며 눈 크게 뜨고 훨씬 열심히 돌아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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