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청춘은 가볍고 영원은 가짜다

아, 아무리 찾아봐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by 천윤준호

예민한 관찰 일지 _ 두 번째 이야기


Playlist. No Surprises _ Radiohead



점점 차가워져 가는 세상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밤마다 찾아오곤 했다. 다들 이빨 요정을 고대할 때, 난 언젠가 찾아올 소멸을 피해 달아나야 했다. 단순히 맹목적인 믿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내가 결국 죽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게 두려워 매일 밤, 신에게 기도했다. 나의 삶이 영원하기를 말이다.


'죽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을 했는데, 결국 죽음은 망각의 늪에 빠지는 것이었다.

내가 가진 기억들을 모두 잊는 거다. 형과 함께 이불에서 해적 놀이를 했던 걸 잊는 거고, 친구와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기억을 잊는 거고, 어린 시절 비행기 조종사가 꿈이었던 걸 잊는 거고, 학교가 두려웠던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선생님과 뒷산에 놀러 갔던 순간을 잊는 거고, 어머니를 따라 밤 산책을 했던 기억을 잊는 거고, 삼국지 비슷한 게임을 하시던 아버지 옆에서 지켜봤던 순간을 잊는 거다.


그래서 죽음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잠에 들기 전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숨을 참았다. 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막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생각을 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기억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죽음과 망각은 경험해 볼 수 있는 그런 경험 따위가 아니었기에 나는 그 궁금증이 불안감으로 직결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죽음보다 소중한 사람들의 소멸이 두려워졌다. 내 옆에서 잠을 자는 형이 나를 잊는 거다.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잊는 거다. 학교에서 같이 뛰어놀았던 친구들이 나를 잊는 거다.


영원을 꿈꿨던 건 그때부터다.

잠에 들기 전 거실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께 마지막 고백을 했다.


"영원히 사랑해요."


이렇게라도 말하고 나면 그 순간만큼은 영원한 것 같았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청춘은 찰나였다. 현재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나를 잉태하시고 자신의 삶은 반납해야 했다.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의 청춘이 영원하길 바랐다. 하지만 머리가 자라고 날이 갈수록 영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나의 삶은 무너져 가는 것만 같았다. 영원을 바랐지만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내게 결핍으로 다가왔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 걸까.


올해 여름은 수분이 많은 날이었다.


이따금씩 소나기가 내릴 때가 되면 아버지가 떠오른다. 우리는 마트에 다녀와 집으로 향하고 있는 길이었다. 아마, 우린 별 대화를 하진 않았다. 흔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부자 관계의 클리셰처럼 그 순간엔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다 소나기가 밀려오는 낭패를 마주했다. 우산도 없던 우리는 쏟아지는 비 속으로 몸을 욱여넣어야 했다. 아버지를 봤다. 평소에 비가 온다면 짜증을 내실 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준호야. 천천히 걷자.”


뛰어야지 비를 보다 적게 맞을 것만 같았는데, 걷자고 말했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비를 맞으며 조금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걷다, 당신은 뛰자고 말했다. 우린 그렇게 쫄딱 젖은 채로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우산을 챙기지 않았냐며 나무랐지만, 그때마저도 당신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젖은 옷을 벗고 머리를 수건을 털고 있을 때, “어때? 시원하지?”라며 당신은 내게 물었다.


그때는 당연하고, 지금까지도 비를 맞았는데 시원하냐고 물었던 사람은 없었다. 갑작스럽게 내리던 비를 맞으면 짜증을 내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고, 나도 그랬다. 심지어는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 뒤에 왔던 문장은 여전히 기억난다.


“가끔씩 이렇게 비 맞는 것도 좋아.”


도대체 비를 맞는 것이 왜 좋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궁금했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내리는 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한껏 젖고는 시원하다고 말하는 당신을 사랑했다. 사랑한다.


그때 사랑은 가까이에 있었고, 눈앞의 사적인 존재는 여름이 되었다. 가파랐고, 기울었다. 예쁘게 말려 놓은 꽃들을 보며 생각한다. 시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존재의식의 변형으로는 변하지 않을 수 있구나 생각했다. 꽃은 결국 시든다. 꽃이 탄생한 순간부터 어쩌면 정해진 운명일지도 모른다. 운명은 진짜이면서 가짜다. 피어날 운명은 씨를 잉태하는 순간에는 불확실하지만, 시들 운명은 확실해진다. 운명은 그런 거다. 진짜면서 가짜.


2022년에 찍었던 영화 <욕조의 코스모스>의 스틸컷


영원을 바라면서 영화를 시작했다. 내가 만들어낸 영화 안에서는 영원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만드는 영화는 가짜다. 내가 쓴 것들은 아무리 진짜 같아도 가짜라는 거다. 그렇다면 그 가짜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겠냐만, 가짜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생전에 진짜였던 순간들을 사랑하며 가짜를 잉태한다. 그렇게 태어난 가짜는 진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아버지가 했던 낱말들을 부둥켜안는다. 부끄럽다. 자유분방했던 그날을 낱낱이 기억해야겠다. 그리고 다시 되돌려 천천히 탐독해야겠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가짜의 분신이지만 안에 들어 있는 건 진짜다.


나의 졸업영화 <지구탈출!:청춘지탄> 스틸컷


비로소 사랑은 가짜다. 그날의 상황과 분위기, 날씨, 했던 대화를 떠올리는 건 영원하기에 가짜다. 그럼에도 내가 그런 것들을 응시하는 이유는 가짜 속에 진짜를 숨겨 놓는다는 이유 때문이겠다. 나는 영화나 문장 따위를 통해 진짜를 숨겨 놓았다. 어릴 적부터 내향적인 사람이라 무언가를 표현하기를 두려워했다. 사랑한다면 사랑한다고 말하기를 두려워했다. 그 사랑을 도무지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눈치를 보며, 그 시선들이 나를 죽일까 두려웠다. 언젠가 나의 진심을 알아봐 줄 사람이 나타나길 한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빛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빛을 봐주길 바랐다. 그 길에서 나는 너무 떠들었다. 순간이 마지막일까 두려워 한철의 연정을 모두 쏟아내는 여름의 소나기처럼 떠들어댔다. 찰나의 순간은 변하지 않을 영원처럼 다가왔는데, 시간은 흘러만 갔다.


야속하게도 청춘이라고 하는 녀석은 항상 지나쳐갔다. 왜 청춘은 항상 지나가는 걸까. 어린 아버지와 어머니의 청춘은 왜 끝이 나야 하는 거였을까. 그들의 청춘을 바쳤던 나의 청춘은 언제까지일까. 반드시 끝이 있는 거라면 나는 왜 그걸 두려워하며 살아야 했던 걸까.


사랑에 비하면 영원은 한없이 가벼운 것이었다.


그런 말들이 진실일 수 없는 필연의 거짓인 줄 알면서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은 아름다울 수 있었을까. 지하철 개찰구 밑에 굳어버린 피 한 방울은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순간은 영원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 이번 계절은 한쪽으로 기울었다.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았던 그들의 분신은 모자이크 되어 점차 소멸해 갔다. 하지만 영원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길들였고, 그들은 나를 길들였다. 길들인다는 것과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가장 중요한 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어린 왕자의 여우가 말했던 것처럼. 연이 사라져도 실 끝은 남고, 실마저 사라져도 손의 흔적이 피를 머금고 남아 있듯이, 눌어붙은 커피자국처럼 지나간 순간의 흔적을 꽈-악 붙들어 안는다.


“힘이 들 때는 하늘을 봐.”


어머니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린다.


고작 그 한 마디로 무너질 단단한 모래성처럼 연약한 마음에 임시방편의 신념을 끼워 넣었다. 해야겠다. 해야겠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멈추지 않는다고 했지만, 보이는 세계조차 멈추게 하는 것들을 느낄 때가 있는 것처럼 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건 예를 들어 사랑이나, 사랑이나, 사랑 같은 것들.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어쩌면 보일 때가 있다. 만질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건 분명히 부드러우면서 촉촉한 촉감. 쿡 누르면 터질 것처럼 부푼 물방울 같을 거다. 조금씩 낡아가고 주름지는 어머니는 자신의 피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천천히 어루어 만진다. 숨을 내뱉는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손을 잡는다. 그녀는 여전히 말랑 인다.


아, 아무리 찾아봐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 모래알 같은 거다. 한없이 부서져 고운 입자를 가지고 있는 해변가의 모래알처럼 피부에 달라붙는 거다. 영원은 가볍고, 청춘은 가짜지만, 별안간 사랑이었다.


사랑해야겠다.


이번에 참여했던 전시회에 숨겨진 이스터에그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