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종말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우리는 왜 믿는가 5화

by 천윤준호

종말은 늘 공포의 얼굴로 먼저 도착했다.

불타는 도시, 무너지는 하늘, 심판의 언어. 그 심판이라는 어감이 우리의 공포심과 두려움을 초래한다.

그래서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서 종말은 자주 ‘끝장’처럼 오해된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살아온 삶이 판결받는 순간. 그렇기에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종말을 두려워하고, 믿음을 일종의 보험처럼 붙든다.


Z가 말했다.

종말은 구원일 수도 있다고.


기독교의 종말론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종말은 단순한 파멸이 아니라 ‘마침내 더 이상 연기되지 않는 순간’에 가깝다.


기독교에서 종말은 역사에 대한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역사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신뢰다.

이 세계가 우연히 흘러가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의미를 요구받는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마지막 장은 폐허에서 끝나지 않는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것은 도피가 아니라, 반복에 대한 거부일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같은 폭력, 같은 배신, 같은 고통이 영원히 반복되지 않겠다는 약속. 종말은 그 반복을 중단시키는 장치다.


그래서 종말은 어떤 이들에게 구원일 수 있다.

이미 충분히 망가진 사람들, 이 세계에서 정의가 지연되는 것을 너무 오래 목격한 사람들, 끝내 보상받지 못한 슬픔을 품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믿었던 자들에게.


기독교적 믿음에서 구원은 상황 개선이 아니다. 환경이 나아지고, 고통이 제거되는 문제라기보다는 이 세계 전체가 더 이상 고통을 정상으로 삼지 않게 되는 사건이다. 종말은 바로 그 정상성의 전복이다.


그래서 믿음은 종말을 재촉하지 않는다.

믿음은 세계를 증오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끝이 온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금을 함부로 소비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깨어 있으라‘

여기서 깨어 있음은 공포에 떠는 태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마지막처럼 살아내는 감각에 가깝다.


종말을 믿는 사람은 현재를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다룬다. 지금의 사랑이 영원 앞에 놓일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의 선택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는가.

도망치듯이도, 계산하듯이도 아니다.


구원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세계를 저주하지 않는 것.

종말이 올 것이라는 이유로

오늘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


믿음은 끝을 바라보는 기술이 아니라

끝이 오기 전까지의 시간을 감당하는 자세다.


종말은 희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내게 그 희망은 달콤하지 않다.

그럼에도 지금의 불완전함을 끝까지 통과하겠다는 결심을 요구한다.


믿음은 말한다.

언젠가는 끝난다. 그러나 그 끝까지, 너는 사랑해야 한다고.


우리는 왜 믿는가.

종말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종말이 오기 전의 시간에도

우리가 인간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에.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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