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믿는가 6화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착하게 살라는 도덕적 권유, 혹은 사회에 도움이 되라는 훈계로 소비되기 쉽다.
그러나 이 문장이 처음 던져졌던 세계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았고, 개인의 삶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하기보다는, 불완전한 세계 안에서 인간이 어떤 태도로 남아 있을 것인가를 묻는 문장이었다. 불완전한 세계. 그건 우리의 세계다.
빛은 어둠을 제거하지 않는다.
다만 보이게 만든다.
길의 윤곽, 위험의 위치, 타인의 얼굴.
빛의 역할은 세계를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 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다. 그래서 빛은 언제나 노출을 동반한다. 드러난다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구별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알베르 카뮈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세계가 본질적으로 부조리하다고 보았다. 세계는 인간의 기대에 응답하지 않고, 고통에는 설명이 없다. 그럼에도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반항하는 인간이란,
세계를 낙관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계의 어둠을 정확히 인식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존재다.
어둠을 인식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존재라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카뮈에게서 빛은 구원의 약속이 아니라,
부조리 속에서도 눈을 감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어둠을 지우지 못해도, 어둠을 외면하지는 않는 것.
소금은 또 다른 차원의 태도를 요구한다.
여기서 말하는 소금은 맛을 내는 존재라기보다, 부패를 늦추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패를 늦춘다는 것은 결국 완전히 썩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썩는 속도를 지연시킬 뿐이다.
그리고 소금이 제 역할을 하려면 반드시 녹아야 한다. 자기 자신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긴다.
이 소멸의 윤리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유와도 닿아 있다. 그는 윤리를 ‘타자를 향한 책임’으로 정의했다. 이 책임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이미 발생해버린 부담이다.
어떠한 보상도 없고, 완료도 없다. 그저 계속 감당해야 하는 상태.
레비나스에게 윤리적 인간은 자신을 완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소진하면서도 타인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다. 소금처럼, 자신을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에 작용하는 존재.
빛과 소금은 모두 보편적으로 영웅적이지 않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 비유는 세상을 바꾸라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을 구원하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균형을 유지하라고 말한다. 이 태도는 정치적 구호도, 종교적 열광도 아니다. 오히려 극도로 절제된 인간 이해에 가깝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사유가 겹친다. 그녀는 거대한 악이 반드시 괴물적인 얼굴로 등장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오히려 무사유, 즉 생각하지 않음 속에서 악은 가장 평범한 얼굴로 작동한다. 아렌트에게 책임 있는 인간이란, 위대한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에 가담하고 있는지를 끝까지 인식하려는 태도.
이것 역시 빛의 역할과 닮아 있다.
세계를 선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세계의 상태를 보이게 만드는 것.
그대로 상태를 보는 것.
나를 보는 것.
너를 보는 것.
빛과 소금으로 산다는 것은 낙관의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비관을 통과한 뒤에 남는 최소한의 태도에 가깝다. 세계는 어두워질 수 있고, 쉽게 썩는다.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선택. 드러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사라지는 역할을 받아들이는 삶.
이 문장이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인간을 과대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자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끝까지 눈을 뜨고 있을 것, 완전히 썩도록 내버려두지는 말 것,
그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조용히 증명할 것.
그 정도의 삶이라면, 이 세계에서도 아직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내게 빛과 소금은 너였으면 좋겠다.
나의 부패를 늦추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