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믿는가 4화
믿음이 희망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보다, 이미 모든 희망이 철회된 뒤에 더 또렷해진다고 생각했다.
알베르 까뮈가 살았던 세계는 그 어떤 약속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세계였다.
신은 침묵했고, 정의는 늘 늦었으며 인간의 고통에는 설명서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묻는다. 이 세계가 부조리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에게 믿음은 구원의 보증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구원이 부재한 세계에서조차 살아가겠다는 태도에 가까웠다.
이 글은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 믿음이 가장 선명해지는 순간, 그것은 구원을 약속할 때가 아니라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이후다.
(나는 구원이 있다고 믿는다. Z가 말했다. 종말은 일종의 구원일지도 모른다고.)
알베르 까뮈는 명확하게 말했다. 이 세계는 도덕적으로 설계되어 있지 않다고.
고통은 이유 없이 발생하고 선한 사람도 충분히 불행해질 수 있으며 사랑은 언제든 실패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이유로 믿지 않았었다. 선한 사람도 불행해질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지옥같았다.
죄를 저지른 이들은 떵떵 거리며 잘 사는데, 왜 착한 사람들은 불행해져 하는가.
믿을 수 없었다. 믿기 싫었다.
까뮈가 경계한 것은 바로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가짜 구원이었다.
언젠가는 보상받을 거라는 약속, 이 고통은 의미가 있다는 위로, 사랑이 반드시 구원이 될 거라는 믿음.
그는 이런 믿음들을 '철학적 자살'이라 불렀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달콤한 도피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믿음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인간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구원을 부정했지만, 사랑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까뮈의 세계에서 사랑은 구원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를 살려주는 기적도, 나를 완성하는 답도 아니다.
사랑은 실패할 수 있고 떠날 수 있으며
끝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는 사랑을 선택한다.
사랑은 세계를 설명하지 않지만, 세계 안에서 함께 서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믿음이 가장 선명해지는 순간은 바로 여기다.
사랑이 구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누군가를 사랑해버렸다는 사실 앞에 서 있을 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사랑을, 아무런 보증도 없는 관계를, 그럼에도 다시 선택하는 순간.
까뮈가 말한 반항은 거창한 저항이 아니었다.
살아남겠다는 선언도, 세계를 바꾸겠다는 야심도 아니다.
오늘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아주 소극적인 고집에 가깝다.
사랑 역시 그렇다.
사랑은 세계를 구원하지 않는다.
다만 이 부조리한 세계를 혼자 견디지 않게 해줄 뿐이었다.
구원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이후에야 사랑은 비로소 가장 정직한 형태가 된다.
상대를 통해 구원받으려 하지 않고
사랑으로 모든 고통을 상쇄하려 하지 않고
그저 서로의 아주 연약하고 야들야들한 취약함을 확인한 채 곁에 남는 선택!
괜찮아질 것이다 라는 말이 아니라
괜찮아지지 않아도 나는 여기 있겠다 라는 태도.
사랑이 우리를 살려주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사랑하는 것.
그래서 이 험난한 세상에서도 사랑을 택하겠다고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