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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에 Feb 19. 2024

사모님의 첫 공식일정

5살 아들의 등판

사모님으로서의 첫 공식일정은 남편 회사의 진수식이었다.

'진수식'이란 새로 만든 배를 물에 처음으로 띄우는 행사이다. 조선업도 함께 하고 있는 남편의 회사에서, 고객으로부터 의뢰받은 배를 1여 년의 작업 끝에 물에 띄우는 중요한 행사였다. 따라서 배를 의뢰한 관청의 청장님 내외분이 VIP로 참석하신다. 그리고 배를 만든 남편 회사의 대표 내외, 즉 나와 남편도 의전 차원에서 참석해야 했다.


<경비함정 ( 사진=해양경찰청) 출처 : 열린 뉴스통신 https://www.onews.tv/news/articleView.html?idxno=189942 >


일단 내가 행사 당일 휴가를 낼 수 있는지 여부가 가장 중요했다. 다행히 그날 잡혀있던 회의들은 조정이 충분히 가능한 일정이었다. 오케이.


다음은 내가 그 자리에서 할 일을 확인해야 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진수식 때는 진수선을 도끼로 절단하는 행사를 한다. 이때 보통은 선주의 딸이나 아내, 혹은 VIP의 부인이나 딸, 또는 VIP가 여성인 경우에는 본인이 한다고 한다. 이는 탯줄을 끊고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뜻이기도 한다고 했다. 동영상들을 찾아보니 대통령 영부인이 진수식에서 진수선을 자르는 영상이 있었다. 다행히 나는 진수선을 자르는 역할은 아니라, VIP을 의전하는 사모님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오케이

<도끼로 진수선을 자르는 모습,  KTV 캡처분 https://youtu.be/co_w-0 Qt7 Mo >


VIP를 의전하는 사모님의 역할이라면, VIP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있는지 궁금했다. 다행히 소속 관청에서 보도자료로 내 보낸 많은 기사들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정도 정보라면 담소를 나누기에 충분했다. 오케이


마지막은 다섯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갈 수 있는지 여부였다. 나는 남편에게 친정 부모님께 맡기고 나만 내려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회사 공식적인 자리에 천둥벌거숭이 아들내미를 데리고 가서는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편의 생각은 나와 달랐다.

어린 아들이 그렇게 큰 배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을뿐더러, 아빠 회사에서 만든 큰 배를 아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회사 직원들이 자기에게 아주 어린 아들이 있는 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지만, 남편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렇다면 아들과 함께 고!


그렇게 다섯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남편 회사의 진수식에 참석했다. 사모님으로서의 첫 공식행사였다.

나는 아침부터 메이크업에 드라이를 하고, 오랜만에 원피스를 입고 챙겨 온 높은 구두를 꺼내 신었다.


"사모님 오셨습니까. 대표님 보좌하고 있는 xx대리입니다.

행사 동안 제가 아드님을 맡을게요. 동영상을 볼 수 있도록 유튜브를 연결하고,  간식도 작은 회의실에 준비해 놨습니다."

회사에 도착하자 비서분께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xx대리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때문에 신경 쓸게 더 많으시죠? 행사로 정신없으실 텐데 번거롭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겸아. 대리님 말씀 듣고 있어. 여기 작은 회의실에서 얌전히 있기다?"

신이 난 아들내미는 지금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회의실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과자를 먹었다.

 

행사 시간이 다가오자 VIP가 소속된 관청 직원들이 제복을 입고 회사 로비에 모이기 시작했다. 남편 회사 직원들도 분주하게 움직이며 동선을 체크했다.

"사모님,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모두들 깍듯하게 나를 모셨다.

나는 최대한 우아하고 단아하게, 상상 속의 사모님의 모습으로 VIP를 맞이했다.

등을 꼿꼿이 세우고 어깨를 쫙 폈다. 목소리에도 예의와 권위를 실었다. 내가 영부인이라도 된 것 마냥 VIP 내외분과 악수를 나눴다. 지위체계의 보좌하에 나는 온전히 사모님이었다.

작은 회의실 문을 빼꼼 열고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장난꾸러기 아들은 바깥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미난 광경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대리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로비에 서 있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청장님 사모님, 죄송해요. 아들을 맡길 수가 없어서, 오늘 어쩔 수 없이 같이 왔어요"

"어머, 이렇게 귀여운 아가가 진수식에 왔군요. 아이가 있으니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운 걸요?"

VIP 청장 내외분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개구진 표정의 꼬마에게도 악수를 청하셨다.


첫 번째 공식 일정은 행사에 초대된 지역 유지 분들과 15분 정도 실내에서 좌담회, 즉 Ice Breaking 타임을 갖는 것이었다. 이번 진수식은 회사의 행사이기 이전에, 지역의 큰 행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역 군수님, 지역 상공회의소 회장님 등 다양한 분들이 초대되었다.


"겸아, 엄마 저기 큰 회의실로 가야 해. 대리님이랑 TV 보고 있어"

"싫어 싫어"


치마 가랑이를 잡고 있는 아들은 떼어 놓으려 했지만, 완강한 아들 덕에 어영부영 아들내미를 데리고 좌담회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들은 당당하게 과자 한 봉지를 손에 들고 내 무릎에 한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이게 누구야, 이사장 손자인가?"

군수님께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신다.

"아니요 군수님, 제 아들입니다. 하하하하"

남편이 호탕하게 웃자, 군수님도 머쓱하게 하하하 웃으셨다. 그러자 참석한 VIP 분들도 함께 따라 웃었다.

결국 최연소 좌담회 참석자와 함께 좌담회는 시작되었다.

최연소 참석자도 눈치는 있는지, 청장님이 말씀하실 때 과자를 입에 넣더니 조용히 녹여 먹었다.

<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자를 먹고 있는 최연소 참석자>


본 행사로 야외 진수식이 시작되었다.

연단에 VIP 좌석이 마련되었고, 자리마다 참석자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었다.

"대표님" "대표님 사모님" "대표님 자제분"

회사 직원분들께서 5살짜리 꼬맹이의 공식 자리도 준비해 주셨다. 감사하고 죄송했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 아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겸아. 이제 엄마랑 아빠는 앞으로 나가서 테이프도 자르고, 박수도 치고, 샴페인도 깨고 할 거야. 겸이가 뒤에 앉아 있어도 한참을 뒤를 돌아보지 못할 수도 있어. 잘 앉아 있을 수 있지, 형아처럼 멋지게?"

아들은 현장이 주는 긴장감 덕분인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애국가가 울리고, 축사, 답사, 프로젝트 보고 등 공식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들은 내 무릎에 얌전히 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나와 남편, 그리고 VIP 내외분이 진수선을 자르러 연단 앞으로 나가는 동안, 그리고 10번이 넘는 기념사진 촬영동안 한 번의 떼부림 없이 자리에 잘 앉아 있었다.

< 아들아 고맙다. 행사동안 잘 있어줘서 >


행사동안 의젓했던 아들 덕분에 나는 무사히 사모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었다. 엄마도 아니고, 회사 인사팀 팀장도 아니고, 사모님으로서의 존재감을 뿜으면서 말이다.


모든 일정을 다 마치자 직원들이 꼬맹이와 사진을 찍고 싶어 했다.

꼬맹이는 온갖 개구진 표정으로 직원들과 사진도 찍고 VIP 내외분께 선물도 받았다.


회사 행사에 참석한 최연소 VIP

50대 중반 사장님의 상상할 수 없는 어린 다섯 살 우리 아들.

사모님의 첫 공식 일정이자, 대표님 자제분의 첫 공식일정이 무사히 끝이 났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만약 이번 진수식 행사가 유튜브로 생중계되었다면 댓글이 엄청 달렸을 거라고.. 저 스파이더맨은 누구냐.. 하고서!

<회사 유니폼과 제복 속에 스파이더맨 티셔츠는 유독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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