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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에 Apr 01. 2024

첫 해고의 추억

추억이라 말하기엔 심장이 떨릴 정도의 두려움이었다.

인사 업무를 하긴 했지만, 내가 직접 해고 통보의 역할을 해보지는 않았다. 그런 일은 내 상사나 부서장이 하는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다 보니, 어느덧 그 일이, 정말 하기 싫었던 그 일이  일로 다가왔다.


해고 대상자인 권이사님과는 하루 전에 미팅을 잡았다.

"최근 회사의 전략이 변경됨에 따라, 두 개의 조직을 하나로 합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신이 일하고 있는 포지션이 영향을 받게 되었고, 포지션은 더 이상 우리 회사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퇴사에 필요한 절차와 위로금은 HR에서 따로 설명드릴 예정입니다"

본사에서 내려온 건조하기 그지없는 대본을 밤새 연습했다.


드디어 당일, 권이사님의 표정은 생각보다 편안했다.

권이사님은 나를 보자마자 헛웃음을 으며 내가 당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지 잘 안다고 하셨다. 25년간 다녀온 이 회사가 결국은 나를 이렇게 내보내는 거냐며 쓴웃음을 지으셨다. 나는 밤새 연습한 말들을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권이사님은 당신이 이 회사에 공채  몇 등으로 입사를 했고, 신규 비즈니스를 개척했으며, 그러다 외국계 기업으로 매각이 되는 바람에  영어고생을 많이 했다고 이야기하셨다.

하지만 새로운 기업문화와 새로운 매니저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밤새 일을 했고, 흔들리는 팀원들을 다잡기 위해 다독이며 혹은 채찍을 휘두르며 지금의 조직을 만들어 왔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제는 당신이 필요 없어진 순간이 이렇게 허망하게 돌아왔다며, 딸내미 같은 나에게 무슨 불평을 하겠냐며 준비해 온 서류나 보자고 하셨다.


나는 권이사님 얼굴에서 우리 아빠의 모습을 보았다.

고졸이었던 우리 아빠는 국내 대기업 가스회사에서 현장직 업무를 맡고 계셨다. 성실과 고지식이 우리 아빠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복잡한 가스 기계에 문제가 발생하면 안 되었기에, 그의 성실함과 절차상 한치의 오류를 허용하지 않는 FM 식 행동은 현장에서 늘 빛을 발했다. 하지만 회사라는 곳은 일만 성실하게 해서는 안 되는 조직이다. 적당한 정치와 적당한 줄 서기가 필요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아빠의 매뉴얼에는 그런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는 만년 대리였다. 아마도 승진이 어려우셨을 것이다. 그러다 20년을 넘게 일한 그곳에서 해고 통보를 받으셨다. 엄마와 아빠는 대학생이 된 나와 동생을 저녁에 모아놓고, 아빠의 상황을 알렸다. 온 가족이 함께 울었던 것 같다. 아빠는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가 미안할 일이 아닌데,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크셨던 것 같다.

자세한 상황을 이해하거나 회사에 분개하기에는 나와 동생은 어렸다. 그냥 우리가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장학금을 받아 학비에 보탬을 드리면 될 거라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빠는 3주도 안 되는 기간 내에 20년 이상 다닌 회사를 정리하고, 지인의 소개로 이런저런 일을 하시다 문방구를 차리셨었다.


권이사님이 서류를 보자고 하는 순간, 나는 그날 밤 아빠의 눈물과 함께 문방구를 개업하며 신나 하시던 표정이 순식간에 스쳐갔다.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결국은 권이사님 앞에서 아빠 이야기를 꺼내며 눈물을 떨구었고, 해고 대상자인 권이사님이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셨다.


주객이 전도되었던 나의 첫 해고 통보였다.

부터 12년이 지난 지금, 많으면 많게, 작으면 작게 다양한 경우에 따라 매년 조금씩 해고 통보를 하고 있다.


할 때마다 정말 하기 싫은 일 중 하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대상자 앞에서 내가 눈물을 흘리는 애송이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심장에 딱딱한 딱지가 앉아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어떤 상황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냉정함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도 해고 대상자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나  고민하는, 나는 해고 전문가이다. 

<영화 '인디에어'의 해고전문가 조지클루니처럼 아예 이 일만 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혹시 모를 개인 명예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등장인물의 내용은 조금 각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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