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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에 Jun 24. 2024

내 동생 김씨스

내가 "김씨스"라 부르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 내 여동생이다. 동생도 나를 부를 때는 김씨스라고 한다. 미국 어학연수 시절 축하 카드에서 우연히 본 Sis (Sister의 줄임말이라 생각하고 있다)라는 단어에 꽂힌 후 우리는 서로를 "김씨스"라 부른다. 

세 살 어린 나의 여동생과는 어렸을 때부터 한 방을 썼다. 자매의 우애를 생각하여 잠은 꼭 같이 자야 한다는 부모님의 이상한 철학하에, 두 개의 방 중 한 방은 잠자는 방으로, 다른 한 방은 공부하는 방으로 구분하여 그녀와 거의 모든 생활을 함께 했다.

언젠가 한 번은 김씨스가 제발 각방을 쓰자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고,, 각자의 방을 쓰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는 한방을 썼으며, 김씨스가 시집을 가기 바로 그 전날까지도 우리는 한방에서 함께 잤다. 


이런 김씨스는 나와는 참 다른 사람이다. 

감성과 이성

즉흥과 계획

감각과 이론

허용과 단호 

비슷하나 참 다른 우리 둘, 참으로 상호보완적인 우리 둘. 그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 시름이 없어져 버리는 듯한 아이러니한 감정에 감사하기까지 했다.  큐브의 반대편 색깔 블록처럼 그렇게 늘 공존할 것 같던 우리는, 올해 2월 제부의 미국 유학으로 결국 떨어지게 되었다.  


그녀가 그렇게 미국으로 간지 6개월 후, 동생이 어떻게 사는지 너무도 보고 싶어 하는 부모님을 모시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6개월 만에 만난 그녀는 많이 어른이 되어 있었다. 친척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이제 막 돌이 지난 아들내미 하나를 데리고 떠났던 김씨스는, 이제 혼자서 세끼 밥상을 다양한 반찬괌 함께 차려낼 줄 알았으며, 능숙하게 조카 똥기저귀를 갈고, 고무장갑 없이 설거지를 해내고 있었다. 낯선 동네에서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한국인 엄마들과 네트워크를 쌓아가며 적응하는 모습이, 사뭇 내가 알던 동생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아 낯설지만 대견하기도 했다.  


다시 만난 우리 가족은 함께 미국 마트에서 장을 보기도 하고, 동네 산책을 했고, 2박 3일 나이아가라 폭포로 자동차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휴일에 제부는 아빠와 테니스를 치거나 달리기를 했으며, 동생은 엄마와 냉장고 정리를 하거나 새로운 이유식을 개발하는 등 그렇게 일상을 보내기도 했다.

일상이 익숙해질 어느 날, 나는 엄마 아빠를 모시고 뉴욕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내 생일이었기에, 동생이 정성스레 끓인 미역국으로 온 가족이 함께 아침을 먹었으며, 엄마, 아빠 그리고 나는 뉴욕 여행을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셋만 떠난 당일치기 뉴욕여행은 요즘 한창 유행하는 “꽃보다 할배”의 축소판처럼 구겐하임이며, 911 Memorial Park며 Times Square 등 빡빡한 일정으로 이리저리 모시고 다니다, 밤 11시나 돼서야 뉴저지 동생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동생은 Surprise! 라며 생일 케이크를 눈앞에 내밀었다. 딸기가 가득한 케이크를 보며 당연히 마트에서 사 왔거니 하고 고마워하고 있었는데, 이런! 동생이 직접 만들었단다.

베이킹이라고는 조카 먹을 머핀 정도만 굽는 김씨스가 이렇게 멋진 딸기 타르트를 만들다니. 이것을 만드려고 하루종일 반죽하고 크림 섞고 딸기를 골랐을 동생이 그려졌다.


수줍게 카드를 건네며 하는 말이..

“씨스야.. 항상 나는 받기만 하는 동생이고, 씨스는 주기만 하는 언니고.. 나이 서른 넘어서야 씨스한테 변변치 않지만 손수 무언가를 해주네…” 

이놈의 가스나.. 가족끼리 주는 게 뭐고 받는 게 뭐가 있겠나.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웃으면서 만나면 그게 행복인거지.  


나를 위해 항상 기도 한다는 김씨스. 나 역시 그녀를 위해 오늘도 기도한다.

그녀와 제부,, 그리고 조카까지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공항 게이트에서 헤어지는 발걸음이 유독 무겁다. 


2013.9.20 ( 미국에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김씨스는 5년간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나와 엄마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로 이사 왔다. 그 사이 동생은 초등학생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고, 나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시간은 흘렀어도 김씨스와 나는 여전히 각별하다. 

그때 그 시절 동생과 한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이야기 하 듯, 김씨스와 나는 여전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많이 웃기도 하고 많이 울기도 한다. 그녀와 여전히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하다. 그리고 여전히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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