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첫째 용이는 내게 처음이라는 기쁨을 준 아이야.
내 속으로 생명체를 잉태할 수 있음에 놀라움을 준 아이였고, 그 아이가 무사히 첫울음을 터트릴 수 있음에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어. 그 아이가 처음 나와 눈을 마주치며 옹알거림에 괜스레 눈물이 났고, 그 아이가 서랍장을 잡고서 두 발로 설 수 있음에 감사했었어. 언제는 이 아이가 자전거를 혼자 타는 것이 하도 신기해서 공원을 두 바퀴 돌 때까지 내내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었더랬지. 매일 출근할 때면 나와 헤어지기 싫어 울고 떼쓰는 용이를 남겨둔 채, 현관문을 쿵 닫고서 눈물이 하도 나서 화장이 다 지워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었어.
그러던 사이 나에겐 둘째 진이가 생겼지. 둘째는 첫째보다 뭐든 수월했어. 임신도, 태교도, 출산도, 심지어 목욕시키는 일마저도 훨씬 쉬워져서 내가 정말 두 아이의 엄마이구나 스스로 뿌듯한 적 마저 있었어. 하지만 쉽다 해도 둘째는 손이 많이 가는 갓난아기였어. 둘째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동안에, 첫째에게 '혼자 밥을 먹는 것이 씩씩한 형아'라며 숟가락을 쥐어 주었지. 둘째를 재우기 위해 업고 돌아다니는 동안, 첫째에게 폭신한 고양이 인형을 안겨주며 별빛이 쏟아지는 귀여운 스탠드를 켜주고서 금방 돌아오겠노라 이야기하고 말이지.
어느 날은 남편 없이 두 아이를 데리고 도서관을 가던 날이었어. 그곳에는 첫째가 좋아하는 블록 놀이가 많아. 언니도 알지? 예전에 가봤던 거기 말이야. 그런데 그날 유난히 덥고 사람이 많았었던지, 둘째가 오랜만의 외출에 내 등에 업혀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해 멈추지를 않는 거야. 나는 어찌할 바가 몰라, 잘 놀고 있는 첫째 손을 잡고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이야기를 했어.
“용아 진이가 너무 많이 운다. 진이가 너무 울어서 지금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우리 용이는 더 놀고 싶지?”
“음…. 아니야 엄마, 엄마는 진이를 돌봐야 하니까, 그냥 가도 돼”
첫째 손을 붙잡고 도서관을 나오는 내내 첫째의 고개는 도서관에서 떨어지지 않았어.
언니. 진짜 신기하지.. 첫째는 엄마 품을 동생에게 내어주어야 함을 상황적으로 판단하고 있었어. 본인이 떼를 쓴다고 해서 냉큼 달려와 달래줄 엄마가 아님 또한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던 거야. 첫째는 엄마의 사랑이 둘이 되었음을 받아들여야 했고, 엄마가 저녁을 만들고 있을 때면 동생의 동선을 파악해서 적어도 엄마에게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함을 깨닫고 있었어. 갓난쟁이 동생이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을 때, 자신은 토마스 기차를 가지고 혼자 놀고 있어야 함을 알려주지 않아도 너무도 잘 알게 되었던 거야.
둘째는 귀염둥이 동생이고, 첫째는 의젓한 형아니까 말이야.
그렇게 네 살배기 첫째는 철이 들어 있었어.
근데 언니야. 이상하게 나는 그렇게 철이 든 첫째에게 늘 미안하다. 나에게 첫 기쁨과 첫 슬픔을 한꺼번에 안겨준 아이이지만, 나의 사랑이 그 녀석에게 오롯이 갈 수 없음이 짠해지네. 첫째도 아직 사랑이 많이 필요한 아이인데 말이야.
언니.. 첫째란 그런 거야..
그런데 언니.. 그거 알아? 언니도 엄마에겐 그런 첫째야.
엄마에게 온전한 기쁨과 슬픔을 안겨주었지만, 마음 한편엔 미안함과 고마움이 있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하여도, 마음 한구석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그런 첫째 말이야.
그러니까 언니야.. 엄마한테 잘해.. 언니는 그런 첫째니까 말이야.
2016.01.22 (US-1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말 몰랐던 골드미스시절, 미국에 살고 있던 동생을 만나러 미국 출장길에 동생네에 들렀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는 동생이, US-1을 달리고 있는 자동차를 운전하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던 그 이야기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장녀라는 특유의 부담감과 책임감에 어쩔 수 없이 엄마와 심리적 애증의 관계를 가졌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엄마는 어쩌면 나의 그 심리적 부담을 이미 알고서, 미안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또 많이 시큰해졌다.
이제야 내가 엄마가 되니 엄마 마음을, 동생의 마음을 알겠다.
더 잘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