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요즘 유행하는 수족구에 걸렸다. 밤새 열이 났고, 목이 아프다며 물 삼키는 것도 어려워했다. 다행히 진통제를 먹어서인지 다음날 열이 내렸고, 아침에 처음 한다는 말이 "엄마, 나 호박죽 해줘"였다.
호박죽이 먹고 싶냐고 물어보니, 호박죽은 맛있으니까 먹고 싶단다.
전날 밤 제대로 된 밥도 못 먹은 채 약만 겨우 먹고 잠들었던 아들이, 아침에 일어나 제일 처음 먹고 싶은 것이 호박죽이라니... 서둘러 얼려 놓은 찐 단호박을 얼른 꺼내어 호박죽을 쑤었다.
우리 집 호박죽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바야흐로 우리 엄마가 나를 임신했었던 47년 전, 엄마는 입덧을 하는 와중에 호박죽과 기정떡을 가장 많이 먹었다고 하셨다. 특히 나의 고향인 여수에는 맛있는 기정떡을 하는 떡집이 시장통에 있었는데, 아빠는 엄마의 요청으로 그 기정떡집을 수시로 드나드셨다고 했다. 호박죽도 마찬가지이다. 엄마가 호박죽을 직접 쒀 드셨는지, 외할머니가 해주셨는지 알 길은 없으나, 암튼 호박죽과 기정떡은 아직도 회자되는 엄마의 먹덧 음식이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나도 호박죽을 참 좋아한다. 물론 엄마가 해주시는 호박죽이 정말 맛이 있어서기도 하다. 늙은 호박을 푹푹 삶아, 믹서에 간 불린 찹쌀을 함께 넣으신다. 가끔 팥을 띄우실 때도 있고, 새알심을 넣으시기도 한다. 거기에 약간의 소금간과 설탕 간으로 맛을 낸 엄마의 호박죽은 끈적하면서 달큰하면서 인공의 맛이 전혀 나지 않는 든든한 한 끼 보약이다. 유명 죽집에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그런 엄마표 호박죽이다.
늙은 호박이 나오는 계절이면 아빠와 거실에 앉아 호박 껍질 벗기기를 하며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때의 레퍼토리는 엄마가 임신했을 때 이야기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호박죽을 좋아하니. 엄마 뱃속에서 먹은 음식은 커서도 좋아하나 봐', 아니면 '엄마가 아침부터 기정떡이 먹고 싶다고 하잖니. 그래서 내가 새벽에 떡집 문 열자마자 기정떡을 사러 갔잖아' 등등 백번도 넘게 나눈 이야기들이다. 그렇게 아빠와 내가 껍질을 벗긴 늙은 호박으로 엄마는 또 맛있는 호박죽을 해 주셨다.
그러다 나도 독립을 하고, 결혼을 했고, 임신을 했다. 입덧이 그리 많지는 않았고, 드라마에 나오 듯 새벽에 갑자기 먹고 싶은 그런 음식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엄마의 호박죽이 너무너무 먹고 싶어 졌다. 그런데 왠지 임신한 딸이 엄마에게 호박죽이 먹고 싶으니 호박죽을 해달라고 하기가 너무 미안해졌다. 맛있는 호박죽을 하기 위해서는 늙은 호박의 껍질을 힘들게 벗겨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었는지, 임신을 하고 나니 괜스레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격렬하게 들어서였는지 모르겠다.
결국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손질된 신선한 늙은 호박을 엄마 집으로 주문하고, 호박이 도착하는 날 엄마에게 전화해서 호박죽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는 그날 저녁 바로 따뜻하고 맛있는, 내가 기억하는 그 호박죽을 쒀주셨다. 그렇게 임신기간 동안 한참 동안 엄마의 호박죽을 먹었다.
내 뱃속에서 외할머니의 호박죽을 먹고 나온 아들이, 수족구로 열이 내린 첫날 아침에 원한 음식이 호박죽이었다.
요리를 잘 못하는 나는 얼려놓은 찐 단호박에물을 붓고, 찹쌀가루를넣어 끊인 후 소금, 설탕 간을 했다.
늘 그렇듯, 싱거워서 소금을 넣었다가, 맛이 안나 설탕을 넣었다가, 소금을 더 넣었다 설탕을 넣었다, 물을 더 부었다 찹쌀가루를 더 넣었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우유와 치즈를 넣고 끓였다. 호박수프도 호박죽도 아닌 정체불명의 음식을 아들에게 대령했다.
"아들아, 외할머니가 해주신 호박죽 맛은 아니어도 나름 맛이 있다"
"음.... 엄마. 최고!!"
목이 아픈 와중에도 꿀떡꿀떡 어설픈 호박죽을 곧잘 먹는다.
다음날 친정 엄마와 통화를 하다 아들이 수족구에 걸려 목이 아파 음식을 잘 못 삼킨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 엄마에게서 바로 전화가 왔다.
"늙은 호박이 없어서 단호박으로 죽 좀 끓였어. 가져가서 손주 먹여라."
뜨뜻한 스테인리스 통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엄마'의 호박죽이 보였다. 끈적하고 달큰한 엄마의 호박죽을 한 숟가락 먹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