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 한국[조선]
탄금(彈琴)이란 거문고나 가야금 따위의 현악기를 타는 활동을 이른다. 이 탄금 활동은 현악기가 중국 혹은 인도에서 전래된 삼국시대부터 꾸준히 사랑받아왔다. 고구려 무용총의 탄금도를 비롯하여 고구려 고분벽화로서 남아있는 탄금도는 무려 9점에 달한다. 또한 신라의 우륵(于勒, ?-?)은 한국사 3대 악성(樂聖)으로 꼽히는 인물로, 가야금을 아주 잘 탔다고 전해진다. 충청북도 충주의 탄금대는 우륵이 가야금을 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로서 삼국시대부터 탄금에 대한 애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시대 이전의 탄금 회화는 남아 전해지고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국한하여 그 취미와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누가 탄금 활동을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사실 우리는 기녀(기생)를 떠올릴 수도 있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시기에 상업적으로 기생을 담은 여러 엽서와 기념사진이 많이 발행되었는데, 그때의 기생들이 가야금 혹은 거문고를 타고 있는 사진이 많다. 더불어 예악을 하는 기녀들이기에 당연히 그들이 탄금 취미의 주인공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선시대 탄금은 주로 사대부 남성에 의해 이루어졌다. 현악기 중에서도 거문고가 탄금 활동의 대상이었다. 탄금 취미가 엿보이는 회화를 살펴보면, 거문고는 주로 남성에 의해 가야금은 주로 여성에 의해 연주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둘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거문고와 가야금의 가시적인 차이는 술대의 유무이다. 거문고는 주로 7줄로 이루어져 술대로 줄을 뜯고, 가야금은 주로 12줄로 이루어져 양손으로만 연주한다.
위의 두 작품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왼쪽의 <후원탄금도(後園彈琴圖)>는 술대가 명확히 보이는 것으로 보아 거문고가 확실하다. 한편 오른쪽의 <청금상련(聽琴賞蓮)>은 양손으로 연주하고 있어 가야금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하였던 것과 같이 거문고는 남성이, 가야금은 주로 여성이 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양반은 어떤 때에 탄금 혹은 청금을 하였을까?
그것은 16세기 양반이었던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이 저술한 일기인 『묵재일기(墨齋日記)』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문건은 유배지였던 성주에서 이 일기를 기록하였는데 1535년부터 기록하여 1567년, 73세로 사망할 때까지 충실히 작성하였다. 물론 중간 7년(1528~1544)이 유실되어 있지만 16세기 양반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이문건은 양반 중에서도 거문고를 제작하여 사용할 정도로 거문고에 대한 애정이 유달랐다. 그렇기에 탄금 및 청금 하였던 날들을 상세히 적어 놓아 당시 양반들이 어떤 때에 거문고를 다뤘는지 알 수 있다. 다음의 기록은 모두 『묵재일기(墨齋日記)』를 인용한 것이다.
1) "저녁에 달이 뜨자 걸어서 백화헌의 정원에 들러 매화와 달을 감상하며 꽃 아래에 앉아 탄금으로 한 곡을 탔다."
저녁에 달이 뜨자 정원에서 매화와 달을 감상하며 거문고를 탔음을 말하고 있다. 이 때는 <송하탄금도>와 같이 홀로 앉아 자연을 감상하며 거문고를 연주했을 것이다. 위의 <송하탄금도>와 같은 도상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자주 그려졌다. 이형록 외에도 이재관(李在寬, 1783~1837)과 윤덕희(尹德熙,
1685~1776) 등이 그린 <송하탄금도>가 현전하고 있다.
2) "... 또 사는 곳 서쪽 산기슭 아래의 넓은 들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산에 의지하여 정자를 지었다. 좋은 시절 좋은 날을 만나면 그곳에 가서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시며 객들을 불러 모임을 하면서 즐겼다."
한편, 여러 문인들이 모여 시서화를 나누거나 모임을 즐길 때 역시 거문고를 탔다. 위 <현정승집도>에 보이는 거문고가 이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현정승집도>는 강세황이 안산에서 생활하던 시절 친한 문인 여럿과 함께 복날을 즐기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강세황이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사료와 그림 속 거문고 왼편에 앉아있는 이가 강세황이라는 점에서 저 거문고는 강세황이 탔을 것으로 보인다.
3) "심기가 우울하고 적적하여 탄금을 꺼내어 탔다."
심기가 울적하거나 적적할 때, 마음의 정리가 안 될 때 역시 현악기를 다루며 그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하였다. 우리 역시 힘들 때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가다듬듯, 조선시대 양반들 역시 그러하였으리라.
<월야탄금도>에서는 시동이 뒤에서 차를 끓이고 있고 선비는 달을 바라보며 무릎 위에 거문고를 두고 있다. 이때의 거문고는 무현금으로, 줄이 없어 탈 수 없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도연명(陶淵明, 365~427)은 거문고를 탈 줄도 모르면서 무현금을 마련하여 항상 어루만지며 '탄금의 취미는 알면 그뿐이지 굳이 줄을 튕길 필요가 있냐'라 하였다. 즉, 거문고는 마음을 정화하고 수양하기 위한 일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월하탄금도>에서 단적으로 보여지고 있다.
위의 내용은 모두 처사적 성격의 탄금 활동이다. 모두 마음을 수양하거나 선비로서의 절제된 모습이 반영된 것이다. 혹은 선비들이 모여 시서화를 나누고 대화를 나눌 때의 탄금 및 청금이었다.
한편 당연히 풍류를 즐길 때 거문고를 탔음을 보여주는 회화들 역시 다수 남아있다. 위의 신윤복이 그린 <후원탄금도>와 <청금상련>에서 그 모습이 보인다. 이 외에도 많은 풍속화에서 거문고 혹은 가야금 등의 현악기를 다루며 유흥을 즐겼던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음악과 악기라 하면 종묘제례악 혹은 기녀들의 예악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다. 가장 우리가 빈번하게 노출되어왔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기 중에서도 현악기, 그리고 그중에서도 백악지장(百樂之丈)이란 별칭을 가진 거문고가 사대부 양반의 삶에 밀착되어 있었음을 조선시대 회화를 통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