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퀀텀점프 Apr 04. 2024

30분짜리 발표를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다

막연히 상상만 하던 일이 이루어진 사건

사진에는 안보이지만 바들바들 목소리가 떨고있다

교수님에게서 페이스북 메신저로 연락이 온 것은 1월이었다. 학교에서 70주년 기념행사를 하는데 와서 세미나를 해줄 수 없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올해는 이미 7월에 한 달 일정으로 한국에 들어갈 예정이었기에 감사하지만 힘들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었다. 그러던 3월의 어느 날. 말기 신부전이 온 강아지 보호자의 요청으로 보호자의 집에 가서 안락사를 진행했다. 다시 병원에 돌아와서 그때까지 병원에 있던 원장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1월에 교수님이 연락한 얘기까지 하게 되었다.


또로록 또로록 눈동자를 굴리던 원장이 "너 가고 싶어?"라고 물었다. "당연하지. 언제 기회가 되면 수의대 학생들에게 꼭 얘기하고 싶어. 세상은 넓고 기회는 많다고." 나의 대답이었다.  항공료가 비싸서 이미 여름에 들어갈 예정이라 힘들다고 혼자 구시렁거리니, 비행기값이 얼마냐고 묻는다. 대충 예상 비행기값을 얘기하니 (300만 원 정도?) 두말 않고 말한다.


 "네가 원하면 갔다 와. 비행기값은 우리가 부담할게. 너한테 좋은 기회잖아!" 아! 우리 병원 남자원장은 항상 쿨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인심을 팍팍 쓰는데 오늘도 그런다. 단 여자원장과 협의가 되어야 하니 전화통화로 확정하겠다며 바로 전화까지 건다. 그리고 오케이를 받아낸다. 오! 이 쿨함! 정말 멋져 보인다.


한국에 교수님께 연락드리니 위원회와 상의해 보고 바로 연락을 주셨다. 여기도 오케이란다. 오오! 순식간에 나의 갑작스러운 한국행이 확정되었다.


내가 수의사로 캐나다에서 일하면서 막연히 생각한 것이 있었다. 한국도 좋지만 북미에는 더 많은 기회가 있다는 것을 수의대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먼 옛날 내가 수의대 4학년일 때 미국에서 수의사를 하고 있었던 선배가 수업에 들어와서 미국수의사에 대해 얘기를 해준 일이 있었다. 웃기게도 아침잠이 많았던 나는 그 수업을 빠졌고, 첫 수업에 들어온 그 선배의 이야기를 놓치고 말았다. 만약 그때 내가 수업에 들어갔더라면 나는 아마 더 일찍 건너오지 않았을까? 젊어서 왔다면 좀 더 덜 고생하지 않았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여하튼 막연하지만 생각할 때마다 간절하던 그 생각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사는 캐나다 동부에서 한국을 가는데 꼬박 24시간이 걸린다. 토론토나 밴쿠버에서 출발하는 직항 편을 타기 위해 또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오고 가는 날 포함 4박 5일의 빡빡한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때마침 봄이고 벚꽃이 만개하여 10년 만에 화사한 한국의 봄날을 즐길 수 있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로 친청과 시댁을 다 방문했다. 10년 만에 복국도 먹게 되니, 변하지 않은 그 맛에 감동도 했다.


세미나가 열리던 호텔앞 벚꽃이 만개했다

70주년 기념행사는 생가보다 화려하고 큰 행사였다. 북미에서 수의사가 되는 과정과 내 경험을 풀어내는 30분짜리 발표는 300명이 넘는 학생들과 큰 무대에서 앞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마무리되었다.


일전에 줌미팅으로 1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한 적이 있어서 자신만만했는데 실제로 현장에서 하는 발표는 넘사벽이었다. 좀 더 잘 준비할껄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발표가 끝나고 찾아와서 관심을 표하는 후배들을 보니 너무 반가웠다.


캐나다는 이민자의 나라답게 세계각국의 사람들이 와서 산다. 인도, 파키스탄, 이집트, 중동의 각 나라에서 오는 수의사들은 쉽게 보는데 동양에서 오는 수의사들은 보기가 힘들다. 항상 그게 안타까웠다. 높은 수준의 전문지식과 한국인 특유의 꼼꼼한 실습 능력을 가지고 북미에 온다면 더 많은 기회를 만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막연하지만 간절히 바랐고, 우연히도 이루어졌다. 다 주변의 도움 덕분이다.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30분 발표를 위해 짧은 일정에도 지구 반대편으로 주저 없이 날아간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수의사의 샘활로 만족하며 살아가듯이 누군가에 새로운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살짝만 눈을 돌리면,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도전해 보라고.


생각만 하고 행동을 주저하기에는 인생이 너무도 짧다. 도전하고 깨지면서 거기에서 교훈을 얻고 성장해 나가는 것이 진짜 인생이다.




이전 03화 수의사의 가장 힘든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