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 선생님께 요가자세를 처방하다

직장은 없지만 고밀도 콜레스테롤은 있어요

by 사막의 요기

'폭삭 속았수다’에서 금명은 ‘뭐든 길러내는 여름의 기세에 내 어린 부모도 자랐다.’라고 했다.

뭐든 길러내는 여름의 기세라...


뭐든 길러내는 시간이 한국에서 여름이라면, 이곳 사막에서는 뭐든 길러내는 그 시간이 바로 겨울이다.


한국의 여름은 그 기세로 쌀을 여물게 하고, 농부들을 미소 짓게 하지만, 사막의 여름은 그 기세로 모든 것들을 말려버린다. 내 마음도 여름엔 바스러질 듯 건조해져서, 아이들에게 짜증도 많이 냈고, 사막으로 나를 데리고 온 남편을 원망하기도 했다.


뭐든 길러내는 겨울의 기세

하지만 햇볕이 부드러워지는 겨울이 되면, 나 역시 부드러워진다. 마당에서는 아욱과 깻잎이 자라고, 해는 조금 늦게 떠서, 아침에 30분 더 자는 호사를 누린다.


취업실패라는 나의 지난여름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새해의 겨울은 유난히 푸근했다. 새들은 그들의 고운 목소리로 나를 보듬었고, 바람은 차지 않게 청량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사막은 겨울방학이 없다. 앗싸!) 나는 뒷마당에 요가매트를 깔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그 모든 위로들을 누렸다.


새소리… 바람… 햇빛…


지난여름, 나의 수련이 데모 수업을 염두한 연습이었다면, 그 겨울의 수련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 남이 보기에 그럴듯한 자세, 요가 강사 프로필에 올리기 딱 좋은 그런 자세들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보이기 위한 자세에서 벗어나
그동안 소홀했던 속근육에 집중했다.


플랭크 포즈를 할 때는 평소에는 신경 쓰지 못했던 발뒤꿈치 근육까지 집중했고, 나무 자세를 할 때는 눈을 감고 나의 모든 감각이 코어 근육을 향하도록 했다.


아마 겨울이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사막의 햇빛은 나의 아욱과 깻잎을 부드럽게 길러냈고, 그렇게 길러진 아욱과 깻잎은 된장 아욱국과 깻잎 장아찌로 요리되어 나의 속근육이 되었다. 사막의 겨울은 그렇게 뭐든 기어코 길러내고야 말았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마당에서 요가를 하고 있는데 햇빛이 평소와 달리 뜨거웠다. 겨울이 벌써 끝나가고 있었다. 아욱과 깻잎도 뜨거운 햇빛 덕에 더 이상 연하지만은 않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달력을 봤다. 달력은 벌써 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달력 위에 나의 건강 검진 날짜가 표시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남편이 자기 건강 검진을 예약하면서 내 것도 예약을 해놓은 모양이었다.


나는 건강검진이 싫다. 꼭 숙제검사 받으러 가는 기분이랄까… 그래도 예약해 준 남편을 생각해서 병원에 갔다.


드디어 숙제 검사의 날.

나의 주치의 선생님은 나보다 살짝 연배가 높으신 여자 선생님이시다. 주치의 선생님은 나의 피검사 결과를 보시며 나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셨다.


철분 수치가 낮으니 소고기를 더 챙겨 먹으라고 하셨고(요가를 하면 이상하게도 고기가 안 당긴다), 저혈압이 있으니 너무 싱겁게만 먹으려 하지 말라고 하셨다(요가를 하면 이상하게도 짠 음식이 안 당긴다).


그러시다가

“어머, HDL(고밀도 콜레스테롤) 수치가 엄청 높네요.”라고 말하셨다.


깜짝이야…

이 나이가 되면 무슨 무슨 수치가 높다라는 말을 들으면 심장이 쿵 한다.

다행히 HDL은 LDL(저밀도 콜레스테롤)과 달리 좋은 콜레스테롤이라고 알고 있던 터라 ‘휴’하고 속으로 안심했다.


“선생님, HDL은 높아도 괜찮은 거 맞죠?”


주치의 선생님은 내 질문에 친절하게 답해 주셨다.

“괜찮은 게 아니라 HDL은 높을수록 좋은 거죠. 운동 안 하면 HDL 수치가 이렇게 높기 쉽지 않은데, 운동 열심히 하시나 봐요. 운동 일주일에 몇 번 하세요?”


나는 일주일에 대여섯 번 한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며 다시 물으셨다.

“아니 어떻게 운동을 그렇게 자주 하세요? 무슨 운동?”


나는 선생님께 요가를 한다고 말씀드렸다.

뒤이어 선생님은 나에게 어느 스튜디오를 다니냐고 물으셨고, 나는 그냥 집에서 혼자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살짝 망설이다가... 사실 요가 강사 자격증이 있어서 그냥 집에서 혼자 운동한다는... 선생님이 전혀 묻지도 않은 TMI를 더했다.


주치의 선생님은 피검사 결과지에서 눈을 갑자기 떼셨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물으셨다.

“저 강사님 명함 하나 받을 수 있어요? 저 강사님께 배우고 싶어요. 요즘 어깨가 너무 아파요”


태어나서 처음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요가를 배우고 싶다고 말해준 건…


“진짜요, 선생님???”

나는 내 귀가 의심스러워 다시 한번 여쭈었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진짜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지금은 아직 요가 레슨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내가 혹시 요가 레슨을 시작하게 되면 꼭 핸드폰으로 연락 달라고 부탁하셨다.


제주의 여름은 애순에게
만선(滿船)을 안겨주었고

사막의 겨울은 나에게
고밀도 콜레스테롤을 안겨주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나에게 빈혈 검사를 추가로 처방하셨다. 그리고 나는 어깨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될만한 Chest opener 자세들을 선생님께 처방(?) 해 드렸다.

집으로 오는 길에 소고기를 샀다. 그날 저녁의 스테이크는 유달리 맛있었다. 아마 소금을 팍팍 쳐서 그랬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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