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 베란다에서 읽는 시집의 맛
창밖은 오월인데_피천득
창밖은 오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에도 아까운 순간
라일락 향기 짙어가는데
너는 아직 모르나 보다
잎사귀 모양이 심장인 것을
크리스털 같은 미라 하지만
정열보다 높은 기쁨이라 하지만
수학은 아무래도 수녀원장
가시에도 장미 피어나는데
'컴퓨터'는 미소가 없다
마리도 너도 고행의 딸
블로그 이웃분이 소개한 책을 보고 따라 구입했다. 스물이 되면서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 수필집을 읽고 너무 좋아서 줄을 그으며 읽고 다시 읽고, 해마다 봄이 되면 다시 꺼내고 했는데 시집은 처음이다.
영시를 번역한 시집을 한 번 보고는 '시'랑 나는 좀 거리가 있다, 혹은 '시 감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수준이기도 하고. 그런데 시집을 딱, 펴고 깜짝 놀랐다. 이거 진짜 피천득 선생님이 쓴 거 맞아? 혼자 헛웃음을 몇 번 흘렸다.
'창 밖은 오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니! '수학은 아무래도 수녀원장'이라니.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 쓰신 이토록 이해가 되고 와닿고 쉬운 시를 읽으니 마음이 후련해지는 건 뭘까.
시를 가르치면 아이들은 항상 같은 질문.
"선생님, '시'는 왜 어려워요?"
그러면, 나도
"그러게 말이다."
그동안 내가 가르치기 위해 은유와 상징을 읽어내려고 무수히 자료를 찾고 고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풀리지 않았던 '시'들도 물론 훌륭했다.
그런데 마음에 오는 감동보다는 해석해 내기에 바빴다. 물론 수업을 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스스로가 알 길 없어 답답했고 '참 좋았다!'라고 느낀 '시'들은 손에 꼽았다.
베란다에서 늘 커피를 마시거나 간식이나 식사를 하거나 하는 장소로만 애용했는데, 책 보기나 글쓰기에도 좋은 장소. 이사 오고 '베란다의 봄'은 처음이라 봄을 즐길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쁨이 요즘 많이 생긴다. 봄꽃도 심고 이렇게 시집도 읽고.
어디에서 책을 읽느냐는 초보 독자에겐 참으로 중요한 문제다. 시끄러우면 시끄러워서 조용하면 또 조용해서 읽히지가 않는다. 책을 책장에 가득 꽂아 두고서도 아직 초보 독자인 나는 야외 베란다에 나와서는 시가 좀 읽힌다. 아, 시는 바람을 좀 쐬며 찬찬히 읽어야 맛이 나는 거였구나.
그런데 책을 오래 읽으려면 나무의자가 좀 딱딱해서 좀 더 푹신한 자리가 필요하네. 자꾸 사고 싶은 것들만 늘어나는 나라는 인간.
아, 창 밖은 오월인데!
나는 베란다로 나간다. 봄 햇살과 피천득 선생님의 시집은 진짜 봄이다. 시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계절.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시'를 쓸 수 있겠다.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