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같은 남편과 사는 기분은?
백합 살까?
- 그는 아직도 소년 같다.
소년 같은 남편과 사는 기분은?
물론 10여 년 동안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설레고 기쁘다.
아이들만 집에 있을 수 있는 나이가 되고 우리는 저녁마다 가볍게 산책을 나간다. 보통은 전통시장 쪽으로 해서 한 바퀴 도는 코스인데 시장 입구 맞은편 정체불명의 가게에서(온갖 것들을 다 파는 듯한) 화분도 판다. 집에 이미 포화상태라 나는 그쪽을 피해서 가려는데 이미 가게 앞에서 꽃을 보고 있는 남편.
60대 초반쯤 보이는 가게 아주머니는 남편에게 이 꽃 저 꽃을 권하며 많이 사라고 하신다. (한 숨) 남편은 할머니와 꽃 키우는 재미에 대해 수다를 떨고 있고, 나는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가자'고 눈짓을 한다. 그러다 그에게 꽂힌 백합 알맹이들.
할머니, 저게 뭐예요?
응, 백합.
백합은 양파과라서 한 철 잘 피우고 절대로 물 닿지 말고, 신문지에 싸서 냉장고에 두면 내년에 또 필 꺼여.색깔은 흰색인지 자주색인지 모르겠네. 섞어놔서.
남편의 눈이 빛났다. 허걱. 새롭고 재밌을 때 나오는 저 눈빛. 살면서 몇 번 봤다. 덕분에 이렇게 꽃과 나무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아가면서 우리도 식물을 드디어 살릴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이번에 산 튤립 꽃이 다 지고 나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백합 이야기를 들으니 방도를 알게 되었네.
그래서 사 왔다.
백합 두 알맹이.
베란다에서 백합을 심는 남편 곁에서 작은 아이는 물조리개로 물을 준다. 아이는 꽃이나 식물의 이름을 외우거나 베란다에 나가 초록이들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큰 아이는 '그게 뭐가 재밌냐?'며 호스의 물을 온 가족에게 뿌리며 '같이 할래요?'를 외치고.
백합이 날까?
모르겠어.
그야 나도 모르지.
껍데기만 봐서는 내가 알고 있는 그 백합의 모양이 나올 수가 없을 것 같은데. 흙 속에 파 묻힌 백합 알맹이의 속내도 전혀 알 수가 없고. 잠시 3초 반짝이며 생각한다. 양파 같은 저것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게 된다는 약간의 상상에 오, 소름 돋는 희열.
죽은 줄로 알았던 수국에서 새 잎사귀가 났다. 고맙다고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른다. 겨울을 버텨낸 우리 집 화분들이 처음이라 나와 남편은 정말 대견하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군산 여행 갔을 때 사온 유칼립투스도 하나는 죽고 이것은 살아남았는데 계속 완두콩 같은 잎이 나오고 나오는데 해 준 것도 없이 잘 살아주고 있는 식물들이 장하다.
제라늄은 색색으로 대 여섯 개를 들였는데 작은 나무들은 여전히 작고, 사진의 이 제라늄만 싱싱한 편. 너무 햇빛이 들었나 싶어 이리저리 옮겨보는데 실내에 있을 때 보다 야외에 나가니 더 시들해 보인다. 식물 전문가인 엄마에게 물어보니 갑자기 밖에 나가면 사람이 눈부신 것처럼 식물도 그렇단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늘에 두고 서서히 해를 보게 해 주라고, 적응이 되면 양지에 두면 된다고 하셨다.
아, 너희들 햇빛에 눈 부셨구나.
몰랐어. 정말.
밖에만 나가면 무조건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미안해.
식물 공부는 끝이 없나 보다. 아예 한글 파일로 표를 작성하려고 자료를 조사 중이다. 식물을 좋아하게 되고 엄마랑 이야기도 잘 되고 남편과도 이야기를 더 즐겁게 할 수 있어 좋다.
오늘은 온종일 흐렸다. 저 멀리 산에는 안개가 가득이네. 이런 날씨도 멋이 있구나, 하면서 화분에 마무리 물을 주었다. 그리고 남편의 회의 때문에 갑자기 어그러진 주말 캠핑이 못내 서운해 베란다에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그렇게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갑자기 취소되니 왜 이렇게 섭섭한지. 나도 아이들처럼 간절히 나가고 싶었던 걸까)
백합에게 언제 싹이 날 것이냐고 물었지만 답은 없었다. 마치 잠든 것처럼 고요한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