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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봄날은 가끔 우울하다(w.코미디여 오소서_이승윤)

by 정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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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문체는 어때요?
글의 분위기는요?


네 글은 읽고 나면 기운빠진대.


이승윤의 '코미디여 오소서' 노래를 듣는데 정곡을 찔린 기분.


고독을 다 짜내서,

가련함을 팔아서,

상처를 벌려서,


나도 그렇게 글을 쓰려고 했었다. 그래야 있어 보여서, 남들이 보기에 글 좀 쓰는 것 같아, 소리를 듣고 싶어서 몽상 속에서 코미디 같은 글을 쓰려고 했다. 그것도 B급 우스개로.(승윤님의 가사는 예술입니다ㅠㅠ)


그래서 글을 쓰고 나면 개운하지 않았다. 없는 우울도 끄집어내어 글로 쓰고 나니, 좋을 리 없었다. 그렇지 않은 상황도 어둡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몸에 밴 문체를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허세는 고치기 힘든 가장 무서운 병 중에 하나다.


백합이 나고, 딸기도 났다. 5월의 햇빛도 좋고 쉬는 날 혼자만의 시간도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몇 달을 글을 쓰겠다고 매일 노력했는데 남은 감정이 우울이라니, 더 실망스러웠다. 아무것도 쓰고 싶지도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젯밤은 국어사전을 뒤적이다가 사자성어가 있는 읽히지도 않는 책을 몇 장 읽기도 했다.


광휘일신
-빛은 날마다 새롭다.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_간호윤, 50p


매주 듣는 소설 수업에서 교수님은 남에게 끌려다니지 말고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라고 하셨는데, 나는 아직도 내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 정확하게 찾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도 못 잡고 솔직하지도 않은 상태.


베란다는 오늘도 빛난다. 매일 화단 정리에 물이 필요한 아이들에게는 바로바로 물을 주고, 햇빛이 강하면 또 화분들을 이동시킨다. 썰지 않는 대파와 무릎에 구멍이 난 아이의 바지와 흩어진 레고 블록들이 빈 집을 채우고, 나는 우울의 근원과 이유와 해결책을 살펴보는데.


오래된 친구 은영이와 오랜만에 통화를 하다가 '우울하다' 했더니 '배부른 소리 그만하라는' 그녀의 말에 몽상이 확 깼다. 예전보다 너무 편하고 여유 있고 모든 면에서 상황이 나아졌는데 나는 말도 안 되는 '우울'이라는 단어를 속에서 끄집어내고 슬퍼하고 있는 중이었다.


배가 불러서이다. 너의 말이 맞다.

한참을 웃고, 맞장구를 쳤다.

가난하면 우울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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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준비하거나 아이들과 같이 있는 시간 동안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리셋시킨다. 무기력함에 살짝 두통이 왔던 오후는 온데간데없다. 아이들의 생기가 우울을 걷어낸다.


소스 없는 스파게티를 첫째 아이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두 가지를 만들 여력이 없어서 큰 아이에게 양해를 구한다. 착한 녀석은 이번 한 번만 그래 주겠다고 한다. 구운 마늘과 얇게 썬 감자를 많이 넣었더니 맛이 더 좋다.


와인잔은 아이들에게 파티 분위기를 더해주려고 이케아에서 구입했다. 오렌지 맛 써니텐이 든 와인잔이 꽤나 마음에 드는지 아이들은 와인잔을 서로 부딪혀본다. 그래. 건배. 무엇을 위해?


그릇을 치우며 다시 혼자만의 시간. 조용하면 찾아오는 이 불청객. 봄날은 가끔 우울하다. 아주 가끔이라 다행이지만, 이 물속을 들어갔다 나갔다 하다 결국 물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풀어진 나사가 어디쯤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1HHvGjurU0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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