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덟 살쯤 우리 집은 배 씨 할머니 집에 세를 들어 살았다. 혼자 사시던 할머니는 항상 엄마 아빠에게 전도를 하셨는데, 우리 집 앞에는 목사님의 사택도 있었다. 목사님이 살던 양옥집이 어찌나 멋져 보였는지 나는 자주 그 집에 이유도 없이 놀러 갔다.
아른거리는 배 집사님의 집. 마르고 작은 몸집으로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간다'며 강단 있게 말하던 할머니에게는 집주인 이상의 포스가 있었다. 우리는 작은 방 두 개에 아주 작은 부엌이 딸려 있었고, 문을 열면 바로 모두의 '마당'이 있었다.
마당에서 동생은 세 발 자전거를 타고 엄마는 빨래를 널었다. 날씨가 너무 눈부셔서 나는 오른손으로 해를 가렸다. 그리고 빨래는 탈탈 터는 엄마의 옆모습은 여위고 슬퍼 보였다. 슬픈 엄마는 나까지 슬프게 해서 싫었다. 돌이켜보면 엄마가 행복해 보이지 않았던 건, 엄마의 탓이 아니었는데 나는 세련되고 예뻐 보이는 다른 엄마들을 종종 부러워했다.
그리고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를 많이 먹어버린 나는 베란다가 있는 집에서 빨래를 탈탈 털어 낸다.
'빛이 좋아 오후면 다 마르겠다.'는 엄마의 옛 말을 따라 하면서.
베란다 있는 빌라 어때?
응, 좋아! 이런 날에는 빨래 널기 딱이라서.
건조기를 백만 원 넘게 주고 샀는데 나는 비가 오거나 너무 추운 날이 아니면 꼭 빨래를 밖에다 널고 싶어 진다. 빨래를 두 손으로 터는 느낌, 널고 나서 빨래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바짝 마른빨래들이 베란다를 채운 풍경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나는 햇빛에 말린 까슬까슬한 마른 천들의 느낌이 좋다. 보통 건조기에서 나온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사람들은 더 좋아하던데, 이상하게도 나는 햇빛에 말린 딱딱한 촉감이 더 빨래답게 느껴진다.
어제는 밀린 빨래를 두 번이나 했다. 일거리를 이것저것 잡았더니 정신이 없어서 어제서야 밀린 빨래들을 발견했다. 내가 이렇게 일 벌이는 사람이 아닌데, 아무래도 남편을 닮아가나 보다.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서로를 닮아가는구려. (나는 남편에게 게으름과 야식의 즐거움을 흠뻑 전달했다. 그는 서서히 물들더니 안정적인 뱃살을 갖게 됐다.)
빨래를 널고 튤립을 보러 왔는데, 산지 3일 만에 빨간 얘가 다 피어버렸다. 진심 너무 슬펐다. 꽃이 피어나는데 이 감정은 뭐니.
주문을건다.
얘들아! 제발 천천히, 천천히 피어야 해.
말을 듣지 않는다. 아주 제멋대로인 튤립이군.
남편은 꽃한테 그렇게 험한 말을 하냐고, 다 듣는다고 한다. 피어있는 동안 예쁘게 좀 봐주면 안 되겠냐고. 미안해. 또 나만 생각했구나. 싶은데 그래도 너무 빨리 핀다. 속상한 건 속상한 거니까 괜찮다고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