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당신의 손을 물었다면_<자전거 탄 소년>

by 정아름

다르덴 형제_<자전거 탄 소년>(2011)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자전거 탄 소년>. 몇 년 전 <로제타>로 처음 만났던 다르덴 형제의 작품이다.

바로 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이 작품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아이를 버리고, 가정이 파괴되고, 서민들의 삶이 어려운 프랑스 사회의 고발? 아니다. 사회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제나 그러했다. 프랑스 사회에 대한 발자크의 말처럼.


"내가 세상 탓을 한다고 생각하나?

천만에. 세상은 항상 이랬어."

-발자크, 고리오 영감"


그렇다면, 보육모로 나오는 아줌마를 통해 사랑과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

아니다. 그런 면이 있기도 하지만 핵심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핵심인가?


바로 이것.

믿음 상실! 나를 믿어 주는 대상의 상실, 내가 믿음을 주고 싶은 대상의 상실.


이 세상을 보는, 어떤 현상과 사물을 대하는 첫 번째 시각과 가치관. 즉,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는가?


현대인의 대답.

'없다.'


그래?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믿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가?


소년은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하지만 소년을 이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소년에게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아버지 하나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극 중의 아버지의 태도를 보면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그리고 버림받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소년이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을 보면) 믿음을 줄 수 있는 대상이 아버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 더 꼽으라면 그의 즐거웠던 삶을 함께 보낸 자전거 하나)


그는 믿음을 잃었다. 더 정확히 믿음을 줄 대상을 잃었다. 그런 그에게 미용실 아주머니가 나타난다. 그녀(사만다)는 소년(시릴)에게 이유 없는, 그리고 헌신적인 믿음을 준다. 왜?


시릴: 왜 저를 맡았어요?

사만다: 네가 원했잖아.

시릴: 그러니까, 왜 허락했어요?

사만다: 글쎄...


선의 특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 선한 행동에 이유가 없다.

둘: 악에 대해 타협 없음 - 불량배 형과의 대화를 보라. ("넌 꺼져.")


헌신적인 믿음을 주는 아줌마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이 영화에서 악으로 대변되는 동네 불량배 형의 꼬임에 넘어간다. 그것도 아주 맹목적으로, 그리고 아주 쉽게. 소년은 왜 헌신적인 아줌마를 칼로 찌르면서까지 이 불량배와의 약속을 지키려 했던 걸까? 그 불량배 형(웨스커)을 믿어서?

NO!


그는 그 형이 이미 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도 악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대가를 요구하려고 이 악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소년은 말한다.


웨스커: 얼마 받고 싶어? 500 유로?

시릴: 필요 없어.

웨스커: 그럼 왜 해?

시릴: 널 위해서.


소년은 유일한, 그렇기에 너무 강력한 믿음의 대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이제 그는 믿음을 부릴 수 있는 대상을 찾고 있다. '오랜 세월 한 자리에 있던 돌이 빠져나간 자리의 커다란 공허'는 그만큼 강한 것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다가오는 아줌마의 믿음보다는 이 악마의 강한 믿음의 유혹에 걸려든 것이다. 같은 처지에 있어 본 불량배 형(웨스터)이 소년을 유인하는 방법을 보라.


아!

이 강함과 부드러움을 능란하게 사용하는 악마의 솜씨. 그리고 그 미끼는 '믿음'이다.


시릴: 어떤 일인데?

웨스커: 믿을 수 있어야 말하지.

시릴: 믿어도 돼.

웨스커: 확실해?

시릴: 그럼.

웨스커: 믿음이 안 가게 생겨서 말이야.

야, 핏불!

너 좀 위선자처럼 보여.

...

농담이야.

너 확실히 믿어.


당연하게도 시릴은 악마로부터 버림받는다. 그리고 상실감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듯 아버지를 다시 찾지만 역시 버림받음을 다시 확인할 뿐이다. 이제 그에게는 아줌마밖에 없다. 시릴은 아줌마와 함께 경찰서로 향한다. 시릴이 말한다.


시릴: 아줌마.... 팔 찌른 거 잘못했어요.

.....

아줌마랑 계속 같이 살고 싶어요.

사만다: 알았어. 뽀뽀해줘.


시릴은 잘못에 사과를 하지 않는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아줌마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내 믿음의 대상이, 그리고 날 믿어주는 대상이 되어달라고 말한다. 피크닉을 나온 시릴과 아줌마는 이제 자전거를 바꿔 탄다. 그들은 이제 서로의 믿음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결론은 좀 의외로 끝난다. 돌에 맞아 죽을 뻔 한 그가 의식을 되찾자 곧바로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


이제 소년에게 남은 것은 순수한 믿음이다. 아줌마, 선한 아줌마에 대한 믿음. 그에게 죽음을 줄 뻔한 상대편도,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날 믿고 있는 아줌마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소년은 자전거를 타고 있다. 끊임없이 페달을 밟는다. 만약 그가 페달을 밟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곧 쓰러질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계속 달린다. 이제 다시 질문해 보자.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는가?"


현대인인 우리 모두는 달리고 있다. 끊임없이 달린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달린다. 현대 철학가네 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다양성, 노마디즘, 유목적 삶......'


당신은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당신의 믿음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 끝이 선인가?


아니면 선을 가장한 (당신에게 가장 필요해 보이는 것을 충족시켜주는) 악인가?


- 시

keyword
이전 05화현대인이 고독의 섬을 벗어나기 위한 탈출속도_김씨표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