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증명하는 배움의 가치

by 인성미남


"그래서, 그렇게 배운다고 삶이 정말 달라져요?"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생각에 잠길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마음 한편에 이런 의문을 품고 살아가고 있을 터다. 취향을 따르고, 감성을 존중하고, 나만의 지도를 그려나간다는 그 모든 이야기들이 때로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당장 내 통장 잔고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내 직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배운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일리 있는 질문이다. 정말로.


만약 우리가 배움의 가치를 오직 외부의 가시적인 성공으로만 측정한다면 - 돈과 명예,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로만 말이다 -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것들은 정말로 '쓸모없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깐. 배움의 진짜 가치라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는 '증명사진'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삶의 내력을 만들어가는 '엑스레이 사진'에 가깝다.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지만, 내면의 뼈대는 완전히 새롭게 바뀌어 있는 상태. 그런 것이다.

배움의 가치는 '무엇을 성취했는가'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로 증명된다. 그 증거들은 아주 사소하고, 조용하며, 때로는 나 자신조차도 무심코 지나칠 만큼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그렇다면 그 증거들을 하나씩 들여다보자.


첫 번째 증거: 세상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예전의 나에게 산책은 그저 '걷는 행위'였다. 음악을 듣거나,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거나, 혹은 어서 이 운동을 끝내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내 눈앞의 풍경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배경, 흐릿한 2D 이미지에 불과했다.

그러다 어느 날이었다. 식물에 대한 작은 다큐멘터리를 본 것을 계기로 동네 식물들의 이름을 하나씩 외우기 시작했다. 아파트 화단의 저 키 작은 나무는 '회양목'이고, 봄마다 노란 꽃을 피우는 저것은 '개나리'가 아니라 '영춘화'일 수 있다는 것. 가을이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저것은, 그냥 단풍나무가 아니라 '당단풍'이라는 종이라는 것.

아주 사소한 앎의 조각들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나의 산책길이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된 것이다. 어제까지 무심코 지나치던 나무 하나하나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 나는 여기에 계속 있었어. 네가 몰라봤을 뿐이지.' 나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그들은 나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계절의 미세한 변화에 따라 잎의 색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떤 열매를 맺고 어떤 꽃을 피우는지.

세상이, 갑자기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평면이었던 배경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진 생명들로 가득한 3D 공간이 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식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조금 배우고 나니,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이 더 이상 소음이 아니라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선율 속에서 고요한 질서와 평온함을 느꼈다. 미술사에 대해 조금 배우고 나니, 여행지에서 마주친 낡은 건물이 그냥 낡은 건물이 아니라 바로크 양식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살아있는 역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배움은 우리의 눈에 새로운 렌즈를 끼워주는 것과 같다. 같은 세상을 보지만, 이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더 깊고, 더 넓고, 더 다채로운 풍경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배움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자, 가장 확실한 변화의 증거다.


두 번째 증거: 내 마음을 설명할 언어가 생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감정들을 느끼지만, 정작 그 감정들에 제대로 이름을 붙여주지 못할 때가 많다. 기분이 그냥 '좋다' 혹은 '나쁘다'.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즐겁거나. 우리의 감정 세계는 몇 가지 단어 안에 갇혀, 뭉뚱그려진 채 마음속을 떠돈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조차 내 마음을 잘 모를 때가 많다. 이유 없이 울적하고, 까닭 없이 불안하다. 이 정체 모를 감정의 안갯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는다.

배움은, 특히 문학과 철학, 심리학 같은 인문학적 배움은, 이 안갯속에 등불을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마음의 언어'를 선물한다.


어느 날,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읽다가 '부조리'라는 단어와 마주쳤다.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아무런 의미도 대답도 주지 않는 비합리적인 세계 사이의 간극. 그 단어를 읽는 순간,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아, 내가 그동안 느꼈던 그 막막함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어떤 시의 한 구절에서 '쓸쓸함'과 '외로움'의 미묘한 차이를 배우고, 어떤 철학자의 책에서 내가 느끼는 불안이 '실존적 불안'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기분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시기심'과 나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는 것을 심리학 책을 통해 깨달았다.

이렇게 내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정체 모를 두려움은 힘을 잃는다. 마치 어둠 속 괴물이, 불을 켜는 순간 하찮은 옷걸이로 보이는 것처럼.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그 감정에 휘둘리는 대신, 그것을 다룰 힘을 얻게 된다.

더 나아가, 풍성해진 마음의 언어는 타인과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든다. "그냥 기분이 안 좋아"라고 말하는 대신, "요즘 내가 하는 일이 의미 없게 느껴져서 좀 공허한 기분이야"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나의 마음을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자, 상대방 역시 나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오해는 줄어들고, 공감은 깊어진다.

이것이 배움이 주는 두 번째 증거다. 우리는 더 이상 길 잃은 감정의 미아가 아니다. 자신의 마음 지도를 정확히 읽고, 타인에게 그 지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지혜로운 언어의 주인이 된 것이다.


세 번째 증거: 시간의 주인이 된다


지식 유목민이었던 시절의 나에게, '남는 시간'은 불안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주말 오후, 약속 없이 텅 비어버린 시간. 퇴근 후 잠들기 전까지의 막막한 시간. 나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내 안으로 욱여넣었다. 의미 없는 유튜브 영상, 자극적인 소셜 미디어 피드, 리모컨을 돌리다 우연히 멈춘 킬링타임용 영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나는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 시간을 흘려보내야 하는 노예였다.


하지만 나만의 나침반을 따라,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시간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텅 빈 시간은 더 이상 불안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선물'이 되었다.

퇴근 후의 두 시간은, 서툰 솜씨로나마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업실이 되었다. 주말 오후는, 새로운 언어의 단어들을 외우며 다른 세계를 꿈꾸는 여행의 시간이 되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15분은, 읽고 있던 책의 다음 내용이 어떻게 될지 설레는 마음으로 상상하는 사색의 시간이 되었다.


배움은, 특히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배움은, 나의 시간을 값진 것들로 채워준다. 그것은 수동적인 '소비'의 시간을, 능동적인 '창조'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재미를 구걸하는 대신, 나 스스로 나의 재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더 이상 우리는 권태와 싸우지 않는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부족함을 아쉬워하게 된다. 알고 싶은 것도, 해보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아서.

이것이 배움이 주는 세 번째 증거다. 우리는 시간에 끌려다니는 대신, 시간의 고삐를 쥔 진정한 주인이 된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해진다.


네 번째 증거: 삶의 파도 앞에서 더 단단해진다


우리 삶에는 예고 없이 크고 작은 파도가 몰아닥친다. 관계의 갈등, 예상치 못한 실패, 미래에 대한 불안. 이런 파도 앞에서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때로는 부서지기도 한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파도가 닥쳤을 때 그 문제 자체에만 매몰되어 허우적거렸을 것이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세상을 원망하고, 나 자신을 탓하며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배움을 통해 나의 세계가 넓어지자,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달라졌다. 역사를 배우면서,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이 과거 수많은 사람이 비슷한 형태로 겪어왔던 보편적인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나 혼자 겪는 특별한 불행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나와 비슷한 시련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그 과정에서 용기와 지혜를 얻었다. 철학을 배우면서, 고통의 의미에 대해,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고, 눈앞의 문제에서 한 걸음 떨어져 더 큰 시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배움은 우리에게 단단한 '내면의 닻'을 만들어준다. 세상의 소음과 삶의 파도가 몰아칠 때, 그것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우리를 존재의 중심에 단단히 붙잡아주는 닻.


물론 배움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파도는 여전히 밀려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 파도를 조금 더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다. 이 파도 또한 지나갈 것이며, 나는 이 파도를 통해 더 단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조용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작고 소중한 변화들. 세상을 보는 깊어진 시선, 내 마음을 표현하는 풍성해진 언어, 시간을 다루는 주체적인 태도, 삶의 파도에 맞서는 단단한 마음.

이것들이 바로, 배움의 가치가 삶으로 증명되는 순간들이다. 이력서에는 단 한 줄도 추가할 수 없고,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가치. 하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것들.

처음에 "그렇게 배운다고 삶이 정말 달라져요?"라고 물었던 사람에게 이제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달라진다.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안에서 무언가 단단하고 아름다운 것이 자라나고 있다. 그것은 외부의 시선으로는 측정할 수 없지만, 우리 자신은 분명히 느낄 수 있는 변화. 바로 그런 변화 말이다.

그리고 그 변화야말로, 진정한 삶의 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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