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척, 잘난 척하지 말자
# 1 _ 강제 이주를 알릴 곳이 별로 없었다
내가 서울에서의 일을 모두 정리하고 이곳으로 와 살기로 했을 때, 난 이 사실을 알릴 ‘주변’이 별로 없었다. 한두 군데 정도? 마지막 출판사를 그만두고, 1년 여 동안 이전 직장의 일을 받아 프리랜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일을 못하게 되었다고, 실은 여차저차해서 고성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오래 연락을 이어 온 고등학교 동창 두어 명에게 같은 소식을 알린 것 정도였다.
출판사의 반응은 별게 없었다. 담당자는 건강하시라고, 좀 걱정이 되긴 하지만 잘 사시길 바란다고 말했고, 출판사 사장의 반응은 더 간단했다. “응, 알았다.”
이보다 좀 더 흥미로운 건 고등학교 동창의 반응이었다. 강남의 유명한 입시학원에서 꽤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강사 일을 하고 있는 이 친구는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와 대뜸 이렇게 물었다. 정말 아무런 도입부 없이.
“본문 디자인하고 조판하는 게 어려운 일이니?”
# 2 _ 소식을 들은 친구는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이게 무슨 소리? 말인즉슨, 꽤 유명한 입시강사이자 저자와 자신이 호형호제하는 사이이고, 그이가 집필한 교재를 만드는 일을 자기가 도와주고 있는데, 이 과정에 참여한 본문 디자이너의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그것까지는 좋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가 좀 이상해졌다.
“혹 네가 이 일에 관심이 있을까 해서…”
그러니까 이 친구는 내가 20년 동안 해온 ‘출판 편집자’의 일과 ‘편집 디자이너’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런 까닭에 다짜고짜 그리 말했던 거다. 솔직히 남의 업에 대해 그토록 무성의하고 무관심하게 군다는 게 좀 안타깝긴 했다. 게다가 그 남이 예전에 나름 가까웠던 고등학교 동창이라면 그 무성의가 더 안타깝게 느껴질 수 있다. 정점을 찍은 건 그다음이었다.
난 두 일이 좀 다른 일이고, 난 ‘편집자’였다는 점, 게다가 만약 두 일이 비슷한 일이라 ‘가정’한다 해도, 난 ‘단행본 편집자’였기 때문에 ‘교재 출판’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설명해 주었고, 일을 소개해 주려는 것은 고맙지만, 내가 일을 정리하고 고성으로 간다고 알려주었는데 굳이 그리하는 까닭이 궁금하다는 점을 피력했다.
# 3 _ 돈 벌 데가 없어서 도망가는 거면 내가 도와줄까?
답은 이거였다. ‘네가 돈을 벌 구석이 생기면 혹 안 내려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라는 것. 쉽게 말해 ‘네가 직장도 잃고 돈 벌 데도 없어서 가는 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였다. 도와주고픈 마음이 너무 크다 보니, 다짜고짜 내 20년 업의 성격을 오해하면서까지 전화를 건 거다.
속상했다. 솔직히 일자리 걱정, 집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래서 ‘강제 이주’라고 자평하기도 한 거고. 하지만 친구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솔직히 몰랐다. 내가 기대했던 건, 아주 순진하게도 격려의 말이었다. 비록 빈말이라고 해도. ‘따뜻한 말 한마디’를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 친구는 내가 20년 전부터 귀농하고 싶어 했다는 걸 아는 이였다.
문득, 이 일이 있기 10여 년 전, 이 친구를 비롯해 수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몇몇 친구들을 수소문해 만났던 일이 생각났다. 나이 들어가며 옛 친구가 생각나고, 그이들과 예전처럼 수다나 떨며 마음을 풀고 싶은 그런 때였다.
그때 난 예전처럼 버스를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녀 보자고, 다니다 술 한잔이라도 하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 돌아다니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유독 이 친구만이 굳이 자기 차를 가져오겠다고, 그 차를 타고 돌아다니자고 고집을 부렸다. 만나고 나서 그 이유를 알았다. 고가의 수입 승용차를 구입한 지 채 한 달이 안 된 시점이었던 거다.
# 4 _ 실은 내 마음이 문제였다, '쪽팔렸던' 거다
잊고 있던 그 일이 생각났고, 문득 ‘왜 그러는 거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다 그게 무척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이가 왜 그러는지는 알 필요가 없었다. 별다른 이유가 없을 수도 있고, 설령 있다 해도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수입 승용차를 자랑할 때도, (굳이 내 업을 오해하면서까지) 자기 업과 벌이를 과시할 때도, 결국 내 ‘마음’이 상했다는 게 중요한 거였다. 난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괜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척하느라 ‘왜 그러는 거지?’라고 묻는 척했다. ‘아, 속상해. 아, 쪽팔려.’ 그냥 그렇게 내 마음과 감정을 인정했어야 했다. 마음이 상한 지 2년이 지나서야 그걸 인정하게 되었다.
우습게도, 그걸 인정하게 된 건 내가 더 이상 그 친구에게 명절 선물을 보내지 않기로 하면서부터였다. 난 어머니 장례식에 와준 것에 대해, 선뜻 적지 않은 부의금을 내준 것에 대해 고마워 명절 선물을 보내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난 괜찮다고, 난 쪽팔리지 않다고, 난 잘살고 있다고’ 말하려 선물을 보낸 거였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낼 필요 없는데, 굳이 보내겠다면 받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그이에게 명절 선물을 보냈다.
이젠 안 보내기로 했다. 대신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기꺼이 장례식에 참석해 부의금을 내겠다 생각했다. 그 정도까지가 정직한 내 마음이었다.
괜찮은 척, 잘난 척하지 말고, 솔직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