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마지막 쟁기질을 멈출 때까지
지난해 말 미리 신청해놓은 포대거름 270포가 밭에 부려졌다. 이장님이 석회고토 10포도 가져다주셨다. 거름이 왔다는 건, 이제 곧 농사철이 다가온다는 이야기다. 물론 엄밀히 말해 농사철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시설에서 겨우내 농사를 지은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겨울을 나야 하는 작물, 이를테면 나처럼 마늘이나 양파를 심어놓은 이들도 있다. 다음 주에는 마늘 동해 방지용 비닐을 걷고, 어서 겨울잠에서 깨어나라고 추비도 줘야 한다.
봄이 온다는 사실에, 봄 햇살이 내리쬐리라는 사실에 설레면서도, 포대거름을 보니 올 한 해 농사를 또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하는 걱정도 앞선다. 다행인 것은, 그 걱정이 외면하고 싶은 두려움이라기보다 잘 해내고 싶은 기대감에서 오는 거라서, 우습게도 크게 걱정할 걱정은 아니라는 점이다.
당연한 일임에도 직접 농사를 짓고 나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체득하게 된 사실 하나. 농사란 한 해에 한 번밖에 실행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한 번은 연중 원할 때 언제든 실행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때’에 맞춰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걸 알고 나니 ‘철든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철든다는 건 어쩌면 철을 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철들지는 않는다. 내가 농사를 직접 짓고, 그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겪고 나서야, 농사란 때를 알고 때에 맞게 해야 할 일을 실행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임을, 게다가 그 일을 아주 성실하게 수행해야만 가을걷이를 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된 것처럼, 철든다는 것도 때에 맞게 삶의 과업을 수행하고, 그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도전을 받아들여야만 얻게 되는 결실 같은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그렇게 철드는 과정에서, 아무리 애쓰며 산다 해도 모든 게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때로는 원치 않는 상황, 또 때로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때를 알고 때에 맞게 해야 할 과제를 면밀히 수행하며 농사를 지어도 예기치 못한 이유로 농사일을 망칠 때가 있다. 한 달 동안 계속되는 우기 같은 장마, 수확을 앞둔 시점에 밀어닥친 태풍, 예년에는 없던 바이러스의 창궐…. 농사일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될 가능성은 너무나도 많다. 그럼에도 농사꾼은 다시 다음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삶도 그렇다.
그러니 철을 알고, 철이 든다는 것은, 때에 맞게 삶의 과제를 성실히 수행해 나갈 줄 아는 것, 그럼에도 삶에 고난이 밀어닥칠 수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 고난으로 휘청거리더라도, 재난으로 주저앉더라도, 또 일어나 다음 일을 준비하고 살아나가려 애쓰는 것이다.
문득, 한 해에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농사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할 수 있을까, 몇 번이나 더 건강하게 수행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다 또 문득 생각한다. 그 모든 게 전체로서 하나의 과정임을, 올해의 농사가 마지막 농사로 이어져 있음을, 마지막 쟁기질을 멈출 때까지 계속되는 것임을, 그러니 어쩌면 철을 알고 철이 드는 것도 죽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 삶의 과정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