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꺾인 옥수수에게, 낯이 타버린 감자 싹에게
늘 같은 음악, 같은 노래를 듣곤 한다. 어릴 적부터, 어떤 달에, 어떤 주에, 짧게는 어떤 날에 같은 노래들을 듣는 것이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러다 보면,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노래를 다시 꺼내 듣는 일이 수시로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고 옛 노래만 줄기차게 듣는,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방식의 청자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한참 자랄 때는 아이돌의 노래도 함께 듣고 즐거워하곤 했다. 하지만, 정신이, 마음이 혼자만의 공간으로 가라앉을 때는, 역시 옛 노래를 들을 수밖에 없게 된다.
하도 비슷한 노래를 반복해 듣다 보니, 대학 시절에는 '시인과 촌장'의 노래를 듣다가, 지나가던 동기에게 "아직도 그걸 듣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 친구로 말하자면, 대단한 다독가에다가 문화예술적인 영역에도 관심이 많은 녀석이었는데, 취향이 비슷한 친구들끼리 모여 쳇 베이커나 너바나의 음악에 대해 수다를 떠는, 그런 친구였다. 하긴 그이들은 내가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책이 해지도록 읽을 때에도, 이제야 그걸 읽느냐며 놀리던 친구들이었으니,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무튼 난 그런 사람이었다. 듣던 노래를 또 듣고, 읽던 시를 또 읽는.
요 며칠 동안은 계속 김광석의 <혼자 남은 밤>과 김민기의 <봉우리>를 들었다. 반복해 듣다가, 괜히 혼잣말을 한다. "명곡이야, 명곡." 고등학생 시절, <봉우리>를 처음 듣고는 가슴이 내려앉아 어쩔 줄 몰라하던 기억이 난다.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고” 하는 대목이 머릿속에 맴맴 돌 때면, 어찌 된 일인지 헛헛한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당시 그 노래가 너무 좋아 어떤 친구에게 들려주니 돌아온 건 냉소적 반응. 지금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란 대목을, 입시지옥을 묵묵히 견디라는 말로 오해했던 것 아닐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한동안은 이러다가, 난 또 다른 노래를 듣겠지. 지난해에는 박정현의 <미아>를 줄기차게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난 정말 길을 잃은 듯한, 내 삶의 주제,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도 가지 않을 수 없는 심정, 그 마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미아>는 얼핏 들으면 이별의 노래 같지만, 내게는 조금 더 영적인 노래로 다가와서, 삶에서 늘 맞닥뜨리게 되는 상실과 좌절, 방황, 길 잃음에 대한 이야기로 느껴진다. 그런 까닭에, 듣고 또 들으며, 오그라든 심장을 움켜쥐며, 돌고 돌아 어디로든 가기 위해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삶이란, 사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거리를, 삶의 거리를 헤매는 일이라, 다 와 가는 듯하다가도, 다시 길을 만나는, 그런 일이라, 늘 미아 같은 심정으로, 어른이 되어서도, 늙어가면서도, 헤매곤 하는 것이다.
<혼자 남은 밤>과 <봉우리>를 들으며, 외롭고, 처연한 마음을 안는다. 삶이란 결국 지독하게 외로운 일이라는 걸 진작 알았으면서도, 아는 것만으로는 마음을 추스를 수 없는 터라, 난 또 새롭게 외로워하는 것이다. 살면서, 삶이란 그렇게 외롭다는 것이, 아내에게 미안한 적도 있었다. 나와 함께하면서도 가끔은 지독히 외로운 그이를 느끼며, 그이와 함께하면서도 가끔은 지독히 외로운 나를 느끼며, 내가 그토록 외로워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그이를 느끼며, 아내에게 미안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랴. 존재한다는 것은 그런 것임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았던가.
또다시 분 가혹한 바람에, 애써 심어둔 감자들의 싹이, 힘겹게 올라온 녀석들의 싹이, 그 가혹한 바람에 타 버렸다. 옥수수는 모가지가 꺾인 채 나뒹굴었고, 양파는 모로 누워 이제 그만 쉬고 싶다 말하는 듯했다. 그 가혹한 바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군락을 이룬 명아주들, 난 녀석들을 쏘아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차라리 네가 될까?" 하지만, 난, 모가지가 꺾인 옥수수처럼, 바람에 타버린 감자 싹처럼,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닌 뿌리를 내리려, 바람을 견디며 살아내려 하겠지. 하지만 옥수수들아, 감자들아, 외로워하지 말려무나. 나, 외로운 마음을 안고, 외로운 호미를 들고, 너희들의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너희들의 옷자락을 다시 여며줄 거다. 살아날 수 있을까. 죽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우리, 그때까지 외로운 마음 안아주며, 살짝 뿌리를 내려보자. 그렇게 해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