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_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부분, 오규원
# 1
젊은 시절, 직접적이고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오규원의 시를 읽다 보면, 가끔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건 내가 사랑하던 다른 시인들에게서 느끼는 감정과 또 다른 것이었다. 그이의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를 읽은 날이면, 그 시구들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날이면, 공연히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곤 했다.
늘 잘못 살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늘 잘못 살기로 했다. 작심 따위를 한 건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잘못 살았다. 우울의 늪을 벗어날 방법을 찾지 않았고, 그냥 우울하게 살기로 했다. 나의 세계는 좁고 어두운 곳에 한정되어 있었다. 관계는 단절되었고, 인식의 지평은 넓어지지 않았다. 거리를 배회하면서도, 인기척을 피해 구석진 곳으로, 더 구석진 곳으로 숨어들었다. 나의 유배지는 내 안에 있었으며, 누구도 황폐한 그 안에 들이지 않았다. 나의 질문은 허공에 흩어졌고, 나의 시선은 뒤통수 너머 어딘가로 사라졌다.
악마 같은 밤을 핑계 삼아 내가 나를 속이고 있었고, 속인 나도 속은 나도 누가 나인지를 몰랐다. 젊은 날의 나는 거짓이었다.
# 2
밭일이 바빠지고 있다. 공연히 감자 한 박스를 신청했나, 후회하다가, 그래도 잘 심었다 생각했다. 포대거름 120여 포를 손수 뿌리고, 비료도 뿌리고, 관리기로 두둑도 직접 만들고, 한겨울 쉬던 몸을 놀리니 안 아픈 데가 없다. 안 아픈 데가 없는데, 그래도 잘 일했다 생각했다.
밭일을 하다 보면, 혼자 밭일을 하다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아내가 돈도 안 되는 농사일을 왜 하려는 건지 물을 때, 딱히 그럴듯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취미로 하는 거냐고 핀잔을 줄 때는 괜히 버럭 성질만 냈다. 취미로 할 수도 있는 건데, 화를 낼 일도 아닌데.
하지만 취미로 하는 일이 아니었다. 밭일을 하며, 계속 묻는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갈 건지, 어떻게 죽어갈 건지. 그러다 문득 몸이 답한다. 팔이 아프다. 다리도 아프네. 허리도 아픈걸. 네가 그렇게 살고 있구나. 잘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고 있구나. 살려고 애쓰고 있구나. 잘못 살았지만, 잘못 살지 않으려 애쓰고 있구나. 너를 밭에 심을 수는 없지만, 마음이라도 심으려 하는구나. 언젠가 동토의 한기로 얼어 죽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뿌리내려 보고 싶구나.
농부가 되고 싶다, 아직은 농부가 아니지만, 밭일하다 죽고 싶다, 생각했다.
# 3
어머니, 꿈에라도 나타나지 않을 어머니, 어디 계신가요. 나는 뿌리 없는 나무, 어디에 이식될지 몰라 헤매었습니다. 오늘도 저 밭 한 귀퉁이 발 담그고 가만히 생각합니다. 실뿌리가 나올까? 하지만, 어머니, 저는 죽어서야 나무가 되겠지요. 죽어서야 뿌리를 내릴 테지요. 아직 살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밭을 가는 것뿐.
어머니, 죽어서야 만날 어머니. 올해는 꽃도 좀 심어 보려고요. 꿈에라도 나타나지 않으시겠지만, 꽃 한 귀퉁이 잠시 다녀가시는 것은 괜찮겠지요. 당신이 좋아하던 봄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