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물이 없다. 씻을 물은 있지만 마실 물은 없다. 나에게 씻을 물과 마실 물은 같다. 세수를 하다가도 목마르면 얼굴에 퍼부울 물을 입으로 퍼붓는다. 갈증이 생길 때면, 정수기나 냉장고로 향하는 대신 가장 가까이 있는 수도꼭지를 찾는다. 부엌이 가까우면 부엌으로, 화장실이 가까우면 화장실로 간다. 거기에는 물이 있고 나는 그걸 그냥 마신다. 아무런 불편을 못 느끼겠다.
영국에서 사람들은 탭 워터(tap water)를 마신다. Tap은 수도꼭지를 뜻한다. 즉 그들은 수돗물을 마신다. 식당에서 물을 주문하면 탭 워터를 가져다준다. 조금 fancy 한 곳을 가면, 주문한 물이 탭 워터인지 돈을 내야 하는 생수인지 물어본다. 기본적으로 그들에게 식수란 수돗물이다. 친구 집에 가더라도, 학교를 가더라도, 펍을 가더라도 수돗물을 마신다.
처음엔 뭔가 께름칙했다. 투명한 유리잔 속을 떠다니는 뿌연 색의 물과 바닥에 가라앉는 석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래도 그냥 마시기로 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라는 법의 입안자인 마냥 그냥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꽤 둔한 편인 나의 성질도 한몫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처지인 다른 비영국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이 상황을 타계해나갔다. 생수를 사 먹거나 필터를 사서 수돗물을 여과해 먹거나 하던 식으로 말이다.
나는 그럴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돈도 아껴야 했고 주변 영국인들이 마시는 걸 보고 힘을 냈다. 이미 임상실험을 마쳤으니 내가 굳이 걱정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마시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수돗물은 생수가 되어갔다. 몇 년 동안 나에게 생수란 수돗물이었다.
그곳에는 정수기가 없었다. 정말 기억을 곱씹어봐도 정수기를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그들은 대신 그 밀키스 같은 수돗물을 끓여 마셨다. 팔팔 끓여 불순물을 제거한 뒤에 차나 커피를 우려 마셨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하루 종일 차를 마셨다. "Cup of tea?"라는 말이 내가 영국에서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일 거다.
그래서 그들은 차나 커피가 차가운 걸 이해하지 못했다. 차가우면 맛이 이상하다고 했다. 차나 커피를 마시다가도 식어 그 온기를 잃게 되면 마치 유통기한 지난 음료처럼 냉정하게 버리고 새로 케틀(Kettle)을 올렸다. 'Can you put the kettle on?'이란 말은 아마 내가 영국에서 두 번째로 많이 들어본 말일 거다. 콜라나 주스 같은 Soft drink는 시원하게 음미했지만 커피나 차는 무조건 뜨거워야 했다. 미지근한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무조건 핫이었다. 콜드와 아이스 따윈 그들의 커피 사전엔 없었다. 내가 탭 워터를 무작정 마시기 시작했듯, 따뜻한 차와 커피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도 한국 사람인지라 목이 매우 타는 여름날에는 아이스 아메 생각이 간절했다. 근데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를 시킬 때면 항상 가능한지 먼저 물어봐야 했다. 그들의 카페에 커피를 위한 얼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얼음이 없는 곳도 많았고 있는 곳에서 주문할 때면, 확실히 바리스타들이 귀찮아하는 것이 느껴지곤 했다.
간혹 얼음이 떠다니는 커피를 마시고 있노라면, 친구들은 날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다. 한 번 마셔보라고 해도 얼굴을 찌푸리며 극구 사양했다. 나도 그런 그들을 보며 참 신기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도 그 신기한 놈들 중에 하나가 됐다. 좋아할 일인가, 싫어할 일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