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나를 유학 보낸 후, 포기한 것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월급의 반 이상을 포기하셨고 어머니는 취미와 집안일 대신 일을 다시 시작하셨다. 동생들은 용돈과 의지할 큰 형을 포기하며 스스로 서는 법을 배워야 했다. 더 이상 나는 미안한 감정을 숨기며 이 사실을 외면할 순 없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학비만 부탁드릴게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 말의 무게를 나는 알고 있었다.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말했어야 했고, 내가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내가 말한 '나머지'는 월세와 생활비를 포함한 비용이다. 생활비는 아끼고 줄이면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월세는 참 고역스러운 놈이었다. 서울 월세가 런던 월세의 집에 갔다가 한 달도 못 버티고 쫓겨날 판이었다. 최소 한국돈으로 80에서 100만 원은 월세로 잡아야 했다. 나는 학생 용돈 벌이 수준이 아닌, 풀타임 같은 파트타임으로 일을 해야 했다.
한식당 주방에서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유는 첫째, 홀보다 페이가 좀 더 셌다. 둘째, 그리운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셋째, 평소에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런던 시내에 있는 한국 바비큐 전문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주말을 비롯한 학교 수업 없는 평일에는 항상 주방에 있어야 했다. 최소 4일 동안, 오전 10시부터 오후 11시까지 풀로 일을 했다. 그렇게 해야만 학업을 위한 내 삶을 연명할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냉동된 고기를 해동해 써는 일을 맡았다. 그러다 야채와 같은 식재료 손질을 하고 시간이 더 지나 김치전, 비빔밥과 같은 간단한 음식도 조리하게 됐다. 애초에 요리를 좋아했던 나에게 주방일은 나름 재밌었다. 업무 강도도 그리 높지만은 않았다. 다만 문제는, 바쁘면 울화가 치밀 정도로 힘들다는 것이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주방 안은 온갖 열들로 인해 모두가 반팔을 입고 있었고 차가운 탄산 없이는 침 조차 삼키기 어려웠다. 또 '효율적인' 공간 배치로 인해 주방 안은 꽤 협소해 일방통행만 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밀려드는 주문표는 지옥행 열차표와 다름없었다. 타오르는 불꽃과 끓는 기름 앞에서 나와 동료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동분서주했다. 땀에 젖어 흘러내리는 위생모와 앞치마를 내던지고 싶지만, 비위생으로 인한 컴플레인이 더 싫었기에, 꾸역꾸역 그것들을 다시 쓰고 허리에 묶었다. 게다가 칼과 불이라는 '살인의 도구'를 다루는 주방에서, 일의 능률을 위해 칼은 항상 날이 서있었고 불은 불맛을 위해 그 기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두르다 자칫 실수가 큰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한 곳이었다.
손님이 식당 밖에까지 줄을 서고 있는 날이면, 우리는 정신없는 주방에서 정신을 붙잡지 못한 채 스스로와 서로에게 예민해져 갔고 주방마감을 구세주 기다리는 마냥 바랐다. 나는 하루하루가 힘들었고 하루하루를 부모님께 손 벌릴까 고민했다. 다행히 고민은 고민으로 그쳤다. 꾹 참으며 이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나는 내 동료들을 보며 그들에 비하면 내 생업의 무게는 깃털과도 같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내 인내의 원동력이었다.
고생을 공유한다는 건 나와 내 동료들을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서로의 짐을 날라주며 우리의 마음도 서로에게 날랐고 나는 그들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다. 주방에서 일하는 그들 대부분은 동남아시아 사람이었다. 네팔,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에서 온 이민자인 그들은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나는 내 어깨에 나 자신의 몫만 지고 있었지만 그들 어깨에는 부인과 자식을 비롯한 가족의 몫이 얹혀있었다. 나는 내가 아플 때 또는 학교 문제로 일을 빼야 할 때, 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쉬어야 할 때 쉴 수 없었다. 정말 아파서 일을 하기 힘들 때도 딱 병원 가는 하루만 빼고 일을 계속했다. 그들에게 하루를 쉰다는 건 그들 가족의 생계와 직결된 문제였다. 아무 연고도 없는 영국으로 온 이민자이자, 타지에서 가정을 지키려는 그들의 삶을 보니 내가 가진 문제는 문제 축에도 끼지 못했다. 나 자신만 먹여 살리면 된다는 사실은 나에게 엄청나게 큰 위안이자 힘이 되었다.
졸업할 때까지 약 2년을 주방에서 보냈다. 학업 때문에 일의 횟수가 정해져 있으니 나의 월급도 한계가 있었다. 약 한화 150만 원 정도를 한 달에 벌었는데, 싼 집을 구해 월세로 80만 원가량을 쓰고 교통비, 통신비, 식비를 제하면 내 손에 남는 건 별로 없었다. 나는 한마디로 거지같이 살았다. 값싼 토스트와 스파게티로 공복을 채웠고 어쩌다 한국음식(비싸다) 아니 중국음식(덜 비싸다)을 먹는 날은 나에게 크리스마스와도 같았다. 유럽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한 시간만 가면 볼 수 있는, 북런던에 사는 손흥민도 못 봤다. 쓰던 폰도 고장이 나 테스코에서 파는 10파운드(만 오천 원) 짜리 2G 폰을 썼다. 집 안에 있어도 발이 얼었다. 지하철 탈 돈이 없어서 수업을 못 간 적도 있다. 나의 가난함을 서술하자면 끝도 없다.
가난을 오랜 시간 직접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의 경험이란 부끄러운 것이다. 다만, 잠시나마 가난이란 걸 경험해보니 인간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단연코 의식주의 '식주'라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먹고 자는 일이 흔들리면 그 위에 어떤 것도 쌓을 수 없다. 부모님 울타리 안에서만 있던 나는, 살아간다는 건 자동적으로 살아지는 줄 알았다. '당연하게도' 잘 먹고 잘 자는 일상생활을 바탕으로 내 꿈을 좇아왔다. 하지만 이것은 어찌 보면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 유학도 식후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