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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레인지타임 Mar 12. 2021

'뜻밖의' 유학


2015년 2월 12일, 나는 약 1년 11개월 동안의 군 생활을 마쳤다. 이 갑갑하고 속박된 생활이 언젠간 끝날 거라는 걸 알았지만, 마치 시계를 보면 이놈이 반항심을 부려 일부러 늦게 걷듯이, 시간은 느리게 흘러 마침 그 해방의 날이 도래했다. 굉장한 행복감과 해방감으로 휩싸일 줄 알았던 내 감정은 허무함과 왠지 모를 허탈감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도 잠시, 내 코앞에는 아주 새로운 미래가 놓여있었다. 외국으로의 유학이었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질 새롭고 낯선 세계를 걱정 반 설렘 반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유학 계획은 꽤(?) 오래된 것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막연하게 생각하곤 했다. '인생 한 번 사는데 외국에서도 한 번 살아보고 싶다'. 이 철없는 막연함은 그저 막연함에 그쳐, 전혀 구체화되지 않았다. 나에게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 예상치 못했던 사건의 결과를 '전화위복'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나는 고3 때 덜컥 결핵에 걸렸다. 꼴에 공부한다고 건강을 챙기지 않은 탓에 나의 면역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이 틈을 놓치지 않은 결핵균이 내 폐로 침투했다. 보건소에서는 불특정한 무언가가 나에게 결핵균을 옮겼다고 했다. 뚜렷한 가해자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그저 유력한 용의자인 비둘기를 저주하며,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염증으로 인해 폐에는 물이 잔뜩 차있었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몸속에서 출렁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의사는 일반 주사기의 약 10배나 큰 주사기를 내 등에 꽂아 그 물을 빼냈고 나는 그저 옆에 놓인, 주사기와 연결된 통이 점점 차오르는 것을 신기한 듯 응시했다. 그 이후로 염증 방지를 위해 항생제를 꾸준히 먹어야 했고, 이 지독한 항생제는 세균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일상마저 파괴했다. 끝끝내 몸에 있는 힘이라는 힘은 다 항생제에 굴복하여, 마침내 나의 괄약근마저 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약 6개월이라는 시간을 학교가 아닌 병원에서 보내게 된다.


그 결과, 당시 나의 대학 입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좌절했다. 하지만 이것이 기회였다. 나는 그동안 어렴풋이 간직했던 유학의 꿈을 다시 꺼냈다. 우리 집은 못살지도 잘살지도 않는 평범한 서민층에 속했다. 나름의 조사와 심사숙고를 거쳐, 부모님께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당시 우리 가족은 집 근처 닭갈비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엄마, 아빠... 나 유학 갈까 생각 중인데... 갈 수 이쓰까?..."

"그래?... 가야지 네가 하고픈데 그럼 우리가 빚을 내스라도 보내주야지"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효율적인 경상도식 대화였다. 이 두 문장으로 나의 실패가 도전으로 바뀌었다.


이제 어느 나라로 갈지 정할 일만 남았다. 고려 사항은 딱 한 가지였다. 내가 배울 점이 가장 많은 곳, 나를 현재보다 더 발전되고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곳. 내 주관적 조사에 의하면, 그 나라는 미국과 영국이었다. 영어를 배울 수 있고, 분명히 한국보다 선진국이며, 기초 학문이 가장 잘 발달한 나라. 이 두 나라 중에 한 나라를 고르기만 하면 됐다. 


나는 당시만 해도 그 두 국가에 대해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근데 뭔가 본능적인 느낌이 계속 영국 쪽으로 쏠렸다. 진지하게 선택지를 숙고하자, 미처 인지 못 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영국 문화를 꽤 좋아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팝송을 들었다. 그것도 굉장히 올드한 팝송이었다. 친구들의 mp3가 버즈, 소녀시대, sg워너비와 같은 유명 한국 가수의 노래로 채워져 있을 때, 내 것은 비틀스, 데이빗 보위와 같은 아버지 세대가 듣는 영국 가수들의 곡이 주를 이뤘다. 고등학생이 되고 스무 살이 되었을 때는 콜드플레이, 뮤즈, 라디오헤드, 플라시보와 같은 브리티시 록에 심취해있었다. 축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올드 트래퍼드 경기장을 누빌 때, 나도 그곳에 미치도록 있고 싶었다. 그렇게 EPL(영국에서는 PL이라 부른다)에 빠져 있었고, 마치 내가 맨체스터 태생인 마냥 열렬히 맨유라는 팀을 응원했다.


이미 영국으로 기운 마음은 미국의 부정적인 모습만 보았고, 내 결정을 아주 쉽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2015년 2월 28일 영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제 비둘기가 나에게 기회와 성공의 상징이 될지, 실패와 혐오의 상징이 될지는 온전히 나에게 달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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