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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미 Aug 14. 2023

10. 오늘 한 번만 간다. 그 후에 나는

402호. 그녀는 너무 예뻐 보였고 하자는 것은 무엇이든 거절하지 않았다. 하루는 매주 화요일 오전에 목사님께서 처음 교회 나오는 분들을 위한 ‘행복학교’를 하신다며 가자고 했다. 아이는 자신이 돌봐준다며 또 환하게 웃었다.  

   

처음 간 그녀의 교회. 가깝다더니 한참을 차를 타고 갔고, 갑자기 구불구불한 시골길로 들어섰다. 온통 논과 밭, 산뿐인데 길마저 외길에 ‘이런 곳에 교회가 있다고?’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사이비가 아닐까.’ 두려웠다. 사이비가 아니라 해도 교회가 집에서 먼 건 싫었다. ‘오늘 한 번만 간다.’ 마음을 굳혔다.  

    

일주일에 한 번. 주일 낮 11시 예배를 드리는 게 고작인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늘 헐레벌떡 뛰어서 갔다. 지각하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 교회는 무조건 집에서 가까워야 한다는 게 지론이었다. 그런 면에서 402호가 다니는 교회는 퇴짜였다. ‘땡!’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을 돌아 도착한 교회는 작지만 아담했다. 산골 깊은 곳에 누가 올까 싶었는데, 교회 마당엔 나처럼 젊은 아이 엄마들로 바글바글했다. 예배당 입구에 커피믹스, 녹차 등 각종 차 종류가 구비되어 있었고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의 태도가 어색하고 못마땅하면서도 동시에 묘한 감동을 자아냈다.  

   

사진: Unsplash의 Sarah Noltner

“자매님 말씀 잘 듣고 은혜받으세요.”

402호는 아이는 자기가 봐줄 테니 안심하고 말씀 잘 들으라고 했다. 지수처럼 엄마를 따라온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목장에 간다고 했다. 동물들 보고 놀다가 점심때 시간 맞춰 데리고 올 거라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녀는 딸아이를 데리고 대기 중인 버스에 올랐다.   

  

예배당 안 긴 나무의자에 앉아 어색함을 감추려고 함께 온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다. 그것도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르면 쭈뼛거리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빤히 목사님을 쳐다보았다. 목사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연신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낯선 상황에서 웃고 싶지 않은데 웃음이 나왔다. 목사님은 옳은 말만 골라서 했다. 뭔가 콕콕 찔림이 있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마치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긍정하는 게 두려워 조심스러웠다.  

    

신기한 것은 한순간도 졸리지 않았는 거다. 목사님이 잠깐 기도하고 말씀을 들은 것이 전부였는데 2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 시간을 짧게 느낀 것이었다. 말씀이 끝나자 밥을 줬다. 심지어 맛있었다. 북적북적 좀 소란스럽고 어수선한 그 분위기였지만 싫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빨려들 듯 그 교회에 갔다. 교회가 멀어서 못 다니겠다는 생각, 오늘 한 번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은 잊었다.

     

사진: Unsplash의 Sarah Noltner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다. 목사님께서 책 이야기를 하면 그 책을 사서 읽었다. 성경 인물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는 성경 어디에 나와요?” 물었다. 402호는 궁금해하는 건 무엇이나 대답해 줬다. 모르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대답해 주었다. 간혹 대답 대신 목사님 말씀 테이프를 들어보라며 건넸다. 궁금했던 성경 말씀을 알아가는 것은 즐거움이 되었다. 아는 것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삶에 변화가 찾아왔다.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다.  

   

둘째 낳고 직장에 복귀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직장 생활을 돈벌이로 했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사명감이 필요한 일을 하면서 안이했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남들은 부러워하는 직업을 포기했다. 전업주부가 되었다.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어색할 때가 많고 반말을 섞어서 하지만. 존대해도 여전히 남편에게 상냥하게 말하는 건 어색하다. 전화 통화를 할 때 유난히 투박하고 경직될 때가 많다. 그래도 반말을 할 때보다는 말에 존중과 예의를 담으려 노력하게 되었다.   

  

과한 옷을 피했다. 목이 많이 파인 옷, 몸에 붙고 비치는 옷을 정리했다. 보통 때는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굽 낮은 단화를 신었고, 단정하게 입으려 노력했다. 수입이 줄었으니 사치와 낭비를 줄여야 했고, 반듯하고 단정한 태도를 위해서였다. 단정한 옷차림과 태도가 나를 더 바르게 할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만하면 괜찮지 착하게 살고 있어’ 하다가 무너질 때도 많았다. 예수 안 믿고도 착한 사람은 많았다. 선하게 살고자 노력했으나 좌절하면서 깨달았다. 사람들의 선의 기준과 하나님의 선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빛이 필요했다. ‘사람은 선하게 사는 것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오직 예수의 완전한 사랑과 용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그렇다고 착하게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진정한 선은 사람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실천할 수 있다. 성경에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도하면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기준과는 다른 하나님의 선의 기준에 이르려면 성령의 인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진: Unsplash의 Sarah Noltner

하나님은 계시의 말씀을 <성경>을 통해 주셨다. 인간은 그것을 믿고 행동하거나 믿지 않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기도 한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들은 그분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시고 지금 이 순간에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산다.


성령의 인도를 받았는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있다. 믿고 행동하는 것이다. 물론 연약한 인간이 자주 잊어버리고 망나니 같이 행동하기도 하고 책임을 회피하기도 하지만.  

    

나는 틀렸다. 착하게 살아야 지옥을 면하고 천국에 가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만큼 선해질 수 없었다. 사랑받았기 때문에 선하게 살아가려고 애쓸 뿐이다. 완벽해질 순 없어도 못난 모습을 그대로 끌어안고 살고 싶지 않았기에 애썼다.


신기한 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을 때도 못난 모습을 벗어나려 몸부림치며 애쓴 만큼 전진해 있었다. 늘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아 자신에게 실망했지만, 실망을 딛고 일어설 때마다 한 뼘씩 자라 있었다. 편한 사람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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