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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미 Aug 21. 2023

11. 잠들면 찾아오는 고통, 해법은 따로 있었다

과학자 유튜버 ‘궤도’<유 퀴즈>에 출연해 가위에 대한 과학적인 정의를 내려주었다. 가위는 뇌는 깨어났지만, 몸이 깨어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뇌가 깨어나 신호를 주는데 몸이 반응하지 않으니 가위눌린 사람들은 ‘내가 지금 많이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아니면 ‘무언가 누르고 있다.’ 생각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건드리는 순간 몸이 깨고 일어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음. 그렇네.’      


가위가 귀신에 눌린 거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귀신이 누르고 있는 것이라면 귀신이 중력의 영향을 받는 것이라서 우리도 손을 뻗어 때리면 귀신이 맞을 거라 걱정하거나 무서워할 것 없다고 했다. 유심히 듣던 나는 이쯤에서 왜 그의 별명이 궤도인지 알 것 같은 분위기에 접어들었다.    

 

그의 과학적 접근은 명료하고 유쾌하다고 판단했다. 한편 그는 가위눌려 본 적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가위눌림은 내게 거의 공포였다. 밤새 가위눌림에 시달려 깨어나고 자고 또 깨어나고 잠들기를 반복하다 무서워서 잠들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나는 가위눌림이 너무 힘들어서 어서 사라지길 간절히 바랐었는데 두려워할 것 없다고 누군가 말해 준다고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그런 생활이 지속되면 체념할 뿐.   

  

사진: Unsplash의 Yustinus Tjiuwanda

1994년 7월 그해 여름은 90년대를 통틀어 가장 더웠다. 7월 평균 기온이 28.5도로 여름 방학 보충 학습 시간 내내 병든 닭처럼 졸았던 기억이 난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쾌재라 금 같은 10분을 엎드려 잤다.  

    

‘다다다다 다다다’ 질질 끌리던 슬리퍼 소리가 경쾌해지면 수업 종이 울린 거다.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책상에 딱 붙어 안 떨어졌다. ‘본드로 몸을 붙였나?’ 무언가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이 일으켜지지 않았다. 친구가 선생님 오셨다며 등을 두드렸을 때야 비로소 부스스 일어났다. 그런 일들이 무수히 반복되기 시작했다.  

   

분명 일어났는데 여전히 엎드려 있었다. 친구들의 목소리, 발소리, 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친구의 이름을 외쳐 부르고자 하지만,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몸만 짓눌린 것이 아니라 목소리도 짓눌려 안 나왔다. 친구가 내 몸을 만져주길 바라며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까딱하려 안간힘을 썼다. 침을 질질 흘렸고 얼굴은 책상에 쩍 붙었는데 눈썹을 파르르 떨어보지만, 깨어나려 애쓰는 내 모습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덥고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 때문에 그럴 거라고만 생각했다. 정월 대보름날 더위를 팔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입맛이 없어 먹지 못했고 살이 쭉쭉 빠져서 거울 보면 기분은 좋았지만 거의 누워만 있었다. 여름 내내 악몽이었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서늘해지고 나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여름내 더위를 먹은 게 확실하다 느꼈고 그때 경험한 현상이 가위라는 걸 알았다. 엄마는 몸이 허해서 그렇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기가 약해서 그런 거라고도 했다.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특별한 처방은 없었다. 여름도 지났으니 괜찮으려나 기대했지만, 날이 서늘해지고도 가위눌림이 찾아왔다.  

    

밤마다 가위눌림 현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날도 깨어나 분명히 엄마 옆에 가서 누웠는데, 여전히 내 방에서 가위에 눌려 용을 쓰고 있었다. ‘엄마! 엄마.’ 부르는 소리에 엄마가 달려왔는데 전혀 아무 변화가 없었다. 환상을 본 거였다. 가위에 눌리면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효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가위에 눌릴 때마다 열심히 외웠다.  

   

사진: Unsplash의 Milada Vigerova

어느 날엔가 가위에 눌려 꿈꾸듯 한데 방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고 시꺼먼 형상이 내 옆에 눕는 걸 느꼈다. 마치 나를 감아 안는 느낌인데 저항할 수가 없었다. 잠에 취해서 눈을 떠도 다시 까무룩 잠이 들어 헤맸고, 때로 벌떡 일어나 서성거리다 졸음이 쏟아지면 속상해서 울기도 했다. 가위눌림은 결혼하고 잠깐 사라졌다가 둘째를 임신했을 때 다시 시작되었다.  

    

둘째를 출산하고 삼칠일이 지나길 기다려 젖먹이를 안고 402호가 다니는 교회에 다녔다. ‘구하라고 그러면 받을 것이요’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데, 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라는 절박함으로 다녔다. 뭘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어설프지만 두 눈 꼭 감고 생각나는 대로 구했다.    

  

처음엔 밤마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앉자 기도했다. 아침잠 많아 예배에 지각 안 하면 다행인 사람이 새벽 기도를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퐁당퐁당 돌을 던지듯 다녔지만. 목사님은 기도 시간을 5분 더, 10분 더 늘리라고 했다. 그렇게 최소 한 시간은 하는 거라고 하셨다.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했다. 기도할 내용이 없으면 눈 떴다가 시계 보고 5분만 더 누군가를 위해 기도했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내서 기도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처음엔 부끄러웠지만, 기도하는 시간에 빵빵하게 찬송이 흘러나왔고, 그 소리에 충분히 옆 사람을 덜 의식할 수 있었다.  

    

기도하는 시간에 주변 사람들은 일제히 “주여!! 주여!! 주여!!” 세 번을 하더니 “따 다다다 랄 라라라라 빠 바바바바”하는데 정상적인 말로 기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떨결에 나도 “주여! 주여!! 주여!!!” 세 번 외쳤고, 오래 기도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 저도 저 사람들처럼 오래 기도할 수 있게 방언 좀 주세요” 했다. 

     

그날 저녁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기도를 하다 방언이 터져 나왔다. 그토록 어렵기만 했던 기도가 쉬워졌다. 밧줄로 단단히 붙잡아 매어 놓은 것 같이 안 가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한 시간 기도가 어렵지 않게 되었다. 우리말로 소리 내어 기도하느라 목도 아플 때도 있고 발음이 꼬일 때도 많았는데 방언으로 기도하니 목도 안 아프고 발음 걱정을 안 해도 되니 좋았다. 무엇을 기도하는지 알 길이 없긴 했지만, 입술로는 방언을 마음으로는 우리말로 기도했다.  

    

사진: Unsplash의 wisconsinpictures

목사님은 성경 말씀을 외우라고 하셨다. 성경에 기록되길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아서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신다고 했다. 꼭 외워야 할 말씀 목록을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나는 그 외에도 마음에 드는 성경 말씀들을 외웠다. 재미있었다. 큰애는 걸리고 둘째는 업고 그날도 교회에 다녀왔다.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한동안은 가위눌림이 없었는데 그 밤. 가위에 눌렸다. 절망했다. 너무 실망한 나머지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그것을 해결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포기해 버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다 소용없나 보다. 말씀도 많이 외우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방언도 하는데, 믿는 자들에게는 표적이 따른다더니 아닌가 보다. 살리든지 죽이든지 뜻대로 하세요’ 생각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내 안에서 성경 말씀이 ‘툭’ 튀어나왔다. 전적으로 내 의지가 아니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장 7절)   

  

손가락을 까닥하지 않고도 눈꺼풀을 파닥거리며 사력을 다하지 않았는데도 스르르 눈 녹듯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가위눌림이 휘발되어 사라져 버렸다. 호흡이 편안해졌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며칠 후 꿈을 꿨다. (그것이 꿈인지 환상인지는 모르겠다) 안방이었다. 내 몸에서 검은 형상이 두 개 일어나서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후로 가위에 눌리지 않는다. 가위눌림이 사라진 지 19년 지났다.  

    

과학은 이미 일어난 현상을 연구해 정의하고 증명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귀신이 중력의 영향을 받니 못 받니 과학적 용어로 이성의 문을 두드리고 알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상을 만들어 내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가위에 눌리는 사람이 더는 가위에 눌리지 않게 해 주고 귀신이든 그렇지 않든 편치 않은 상황을 끝내고 싶은 사람의 소원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세상에는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가 존재한다. 말로 설명하고 이론을 정립한다고 해도 인간은 그저 신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곧 경험하게 될 뿐이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은 세상을 탐구할수록 신이 있다고 단언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평화로워졌다. 하나님의 존재를 깊이 인정할수록 삶은 가벼워졌고 자유로워졌으며 피조물로서 낮아져 사람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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