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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미 Sep 04. 2023

13. 홈스테이 13년을 기록하며

part 1. 기적을 누리는 방법

2009년 2월 목사님은 영어캠프를 한다고 하셨다. 글로벌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로 자녀를 키우려면 영어는 필수라고. 자녀 교육을 위해 기도하시던 중 영어캠프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셨다.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목사님은 카리스마 넘치는 분이고 나는 목사님에 대한 팬심 넘치는 사람이니 무조건 ‘아멘’이었다.   

   

캠프는 초등 3-6학년 아이들 대상이었다. 하루 영단어 800개 암기 2주간 교회 숙박으로 운영되었고 자녀와 부모님 대면은 금지되었다. 영어캠프 교관은 부목사님 외 선생님들 몇 분이었다.   

   

“필승” 부목사님이 빨간 모자와 군복을 입고 빠른 속도로 오른손을 이마 근처 눈썹 가에 붙이시는데 보조개가 쏙 패인 동그란 얼굴은 치아를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음이 샜다. 그렇게 원어민은커녕 영어 전문가 하나 없는 영어캠프가 시작되었다.   

   

사진: Unsplash의 Element5 Digital

목사님은 몇 년 전 서울의 한 유명한 교회에서 ‘개척교회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 서울의 그 교회 홈페이지에 우리 목사님의 설교가 올라갔었던가 보다. ‘당진’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개척교회를 한다는 목사님 설교가 ‘뻔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심결과 호기심에 그 설교를 클릭한 사람이 있었으니. 멀리 영국에서 교육기관을 운영하셨던 남 박사님 부부였다.  

    

그 한 번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은 집사님 부부는 인터넷에 ‘당진 동일교회, 이수훈.’ 검색을 수없이 하셨다고 한다. 샅샅이 뒤졌지만, 다른 설교를 찾기 힘들었다고. 당연하게도 당시에 우리 교회는 그 흔한 홈페이지도 없었고 목사님의 설교를 카세트테이프와 CD로 녹음해 듣던 때였다. 교회는 부흥하고 있었지만, 목사님이 유명한 것도 아니었다.  

   

남 박사님 부부가 서울 강남에 어학원 분점을 낼 것을 기획하고 기도 가운데 있었던 그해 초여름. 기도의 응답을 갈망하던 부부가 확신을 얻지 못하고 찾은 곳은 당진이었다. 기도를 부탁하려는 의도도 어떤 질문을 하려는 의도도 아니었다.   

   

인터넷상으로는 찾을 수 없지만, 당진에 가면 이수훈 목사님을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십 수년을 영국이라는 낯선 땅에 살며 은혜를 갈망하던 그들에게 단비와 같은 말씀의 감동을 선물했던 분이 어떤 분인지 만나보고 싶었다 하셨다.   

  

사진: Unsplash의 Nycholas Benaia

1회 영어 캠프는 2월, 추운 겨울 교회 뒷산에서 스파르타로 극기 훈련해 가며 영단어를 외웠다. 2회 영어캠프는 같은 해 여름 7월이었다. 3회 차를 앞둔 2010년 6월 말. 부부가 교회 마당에 들어섰다.  

   

‘휙 휙’ 파리채가 그들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고 한다. 목사님은 사택에 앉아 파리를 쫓고 계셨다. 남 박사님 내외를 앉혀놓은 목사님은 여전히 파리 쫓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들이 당진에 온 사연을 묵묵히 듣기만 하셨다고 한다.

     

“서울 말고 당진에서 우리 애들 가르치면 어떻겠습니까?”      


목사님은 길게 말하는 타입이 아니다. 남 박사님은 그 말을 하나님 음성으로 들었다. 바로 영국으로 전화를 한통 하셨고, 한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학생들이 모였다. 영국과 미국에서 원어민 11명이 자원봉사자로 한국에 들어왔다. 기적처럼 담당 교사는 전원 원어민 교사로 대체되었다. 강남에 어학원 분점을 내려던 계획은 취소되었다.  

   

매일 영단어 외운다고 ‘특별할 것이 있겠나’ 부모 마음에 의심의 구름이 몽글몽글 몰려오던 순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성도들은 놀랄 틈도 없이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영어 캠프를 안 하겠다고 눈살을 찌푸리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아이들 눈도 동그레 졌다. 가뜩이나 작아진 군복에 넘치는 뱃살들을 욱여넣을 고민에 우거지상인 선생님 한 분은 콧구멍이 벌렁했다.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때로 사람들은 무감각한 경우가 많다. ‘그런가 보다’ 한다. 오직 물 떠 온 하인만 물이 포도주가 된 사연을 알 듯. 그 기적을 체감하는 사람은 적게 마련이다. 하나님이 일으킨 기적을 온전히 체험하는 사람은 혜택을 받는 성도들이 아니라 목사님이었을 것이다.

     

영어캠프를 진행하는 매년. 기관에서는 홈스테이 가정을 모집했다. 딸들은 홈스테이를 하고 싶다고 내 치맛자락을 붙들고 뒤쫓아 다니며 졸라댔다. 홈스테이를 신청한 첫여름 막내가 어려서 고민이 많았지만, 딸들의 성화에 봉사를 신청했다. 휘뚜루마뚜루 첫 홈스테이를 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바짝 긴장했지만 잘 버텼다.    

  

이듬해엔 20평형대 작은 빌라로 이사했다. 남편 꿈은 전원주택을 짓는 것. 아파트 팔고 남은 돈은 땅 사는데 투자했다. 여름이 왔고 영어캠프 진행 소식도 들려왔다. 집이 좁아 홈스테이를 포기했다. 그 해엔 기분이 이상했다. 영어캠프하는 티도 안 나고 재미도 없고 아이들도 시무룩했다. 다음 해엔 과감한 결단을 내렸고 그 후로 매년 홈스테이 했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바람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했다. 환경도 그렇다. 일단 부딪혀 보는 것. 불편해도 서로 참고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렸고 남편도 언제나 우리가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좁은 집에 사는 걸 기관에 알렸고, 배려 차원에서 일부러 늦게 홈스테이가정으로 지원했다. 그런데도 우리 집이 당첨되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매번 늑장을 부려도 우리에겐 기회가 주어졌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영어도 못 하는데 좁은 집에서 낯선 외국인들과 생활하는 걸 불편해하는 가정이 많았다고 한다. 신청자가 늘 부족했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으면 우리 가정이 지원했다고 한다.   

   

우리 집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빌라 맨 꼭대기 층. 에어컨도 안방과 거실에만 있었다.  심지어 화장실도 하나뿐이었다. 원어민들은 선풍기 하나 달랑 설치된 작은 방 2층 침대를 사용했다. 그렇게 지내도 누구 하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더위에 지치고 짜증이 날 법한데 모두가 잘 버텼고 이상하게 군소리 없이 잘 굴러갔다.  

    

사진: Unsplash의 Joss Woodhead

그 좁은 빌라에서. 우리 식구 다섯, 원어민 둘, 총 7명이 복잡 거리며 생활했다. 한 해엔 캐나다로 이민 간 친구 부부의 자녀까지 8명이 지낸 적도 있었다.   

   

좋은 것도 불편하다고 느끼면 불편하게 되고 나쁜 것도 괜찮다고 느끼면 괜찮은 것이 된다. 불가능은 가능이 되었다. 믿음 대로 된다고 했던가. 믿고 바라니 바라는 대로 되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못한다. 정주영 회장은 언제나 “해보기는 했어.”라고 했다지 아마.    

 

힘 한 번 안 들이고 거뜬했던 것은 아니다. 매일 아침 식사 준비와 출퇴근 시 픽업 서비스, 간식을 준비하고 의무 사항이 아니지만, 가족과 원어민과의 짧은 여행 계획 세우기. 함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밤마실을 준비하는 일까지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한국인이나 외국인이나 규칙과 주의 사항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20대의 대학생들은 부주의했다. 머리카락이 나뒹구는 방에, 널브러진 옷가지들까지 인상이 찡그려지는 날도 많았다. 한쪽 눈을 감고 살아야 했다. 본인들 방 청소는 직접 하게 했지만, 매일 아침 메뉴를 정하고 먹이고 아침, 저녁 차량 픽업까지 하면서 2주쯤 시간이 흐르면 지쳐 소진이 되었다.

     

이제 모두 갔으면 좋겠고, ‘다음 해엔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했다.


믿음으로 사는 것도 때로는 한계에 부딪혔고, 좋은 것도 싫을 때가 있었다.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이 그리웠다.      

신경 쓰임과 힘겨움을 넘어 홈스테이 가정으로 섬겼다. 스스로에게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였다. 누군가 던지는 생각 없는 말처럼 ‘원래 잘하니까’ 그 시간을 견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강해지고 싶었다.  

    

더불어 좋은 가정과 원어민을 매칭시켜 주기 위해 애쓰는 교회와 기관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낯선 곳에서 지내며 자원봉사하는 원어민들을 생각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좋은 엄마로 살아가기 위해 불편을 감수했다.

     

참고 견디며 해낸 덕분에 해마다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과 인연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나에게도 더 나아갈 힘이 생겼다. 돌이켜보면 내 의지와 힘으로 견딘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의 기도가 있었고 하나님으로부터 밑 힘이 주어졌기에 가능했다. 그 사랑이 나와 우리 모두를 붙들어 주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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