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미 Sep 18. 2023

14. 영어 울렁증, 자녀 열일곱 명으로 극복

Donna, Christin, Ha-dam, Heather, Yasmin, Vica, Grace, Seara, Rita, Zehnn, June, David. 그동안 만났던 원어민의 이름이다. 모두 나를 ‘엄마’ 또는 ‘맘’이라고 불렀다.  

    

2010년 7월 첫 홈스테이를 시작으로 13년을 돌아보니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추억이 없지만, 유난히 빛났던 조각들을 건져 올려보았다.    

 

2014년. 야스민과 비카가 우리집에 왔다. 야스민은 중국계 한국인, 캠브릿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다는 비카는 러시안이었다. 말 많고 활달한 비카와 대화할 때면 주의를 기울이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야스민을 부르곤 했다. 비카의 러시안 식 발음 때문이었다. 야스민의 도움 없이는 언어 소통에 어려움이 많았다.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쫄쫄이 레깅스를 팬츠로 즐겨 입었던 비카는 어쩐 일인지 매일 울면서 집에 들어왔다. 온통 성경 이야기로 이루어진 교재때문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칠때마다 성령님의 터치를 받아 성경이 믿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영어 캠프를 앞두고 간절한 기도가 되었던 건 오늘을 위함이었을까. 용기를 내어 어설픈 영어지만 그녀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영접 기도를 도왔다.  

    

비카는 이 일로 영국에 있는 남자친구와 매일 전화로 싸웠다. 그녀가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남자친구는 결별을 선언했다. 그래도 그녀는 돌이키지 않았다. 캠프가 끝나고 본국으로 돌아가던 날, 비카에게 성경책을 선물했다. 현재 그녀는 한인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세라 다우니와 그레이스가 왔던 해는 특별했다. 주야로 틈만 나면 피아노 연습을 하던 큰딸이 피아노를 치면 다우니와 그레이스는 화음을 넣어 노래를 불렀다. 둘 다 노래를 잘 불렀고 목소리가 예뻤다. 덕분에 집안에 선율이 가득했다.    

  

둘 다 토종 원어민이라 100% 영어로만 소통해야 했다. 그레이스는 내 서툰 영어를 곧잘 알아들었고 내가 단어를 말하면 딸아이는 문장을 완성해 소통하며 지냈던 기억이 난다. 이 시기에 큰딸 지수의 영어 실력도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우리 모두의 영어 실력이 향상되었다.  

   

세라 다우니와 그레이스가 돌아가기 전날 밤, 우리 가족은 깜짝 이벤트와 선물을 준비했다. 그레이스는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웅크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온 밤을 다 지새울 것처럼 울었다. 그레이스가 영국으로 돌아간 뒤 그녀의 엄마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나와 우리 가정에 대한 감사와 축복의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다우니는 한국을 좋아했고 머물고 싶어 했다. 다우니는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년 만에 다시 돌아와 우리 집에서 한 번 더 홈스테이 했다. 다우니는 스타벅스 시애틀 본점에서 커피를 기념품으로 사들고 왔다. 내가 커피를 자주 마시는 모습을 보고는 스타벅스 1호점의 커피를 사주고 싶었다며 미소지었다. 지금은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계 미국인과 결혼해 예쁜 딸을 낳았다.


3년의 긴 코로나 사태, 2년간은 꿈도 꾸지 못했던 영어캠프가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외국인과 선교사 자녀가 많기로 유명한 한동대학교에서 원어민들이 왔다. 복잡한 검사와 절차를 거쳐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캠프였다. 6학년 막내의 마지막 영어 캠프. 홈스테이를 신청했지만, 뜻밖에도 사춘기 아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남자 선생님으로 받아서 형 만들자고 설득하는데 어렵게 성공했고 데이빗과 준이 우리집에 왔다. 막내로 태아나 누나들 틈에서 치이는 듯 외롭게 크는 아들을 보면 안쓰러웠는데 형 선생님이 생겼다. 아들에게 남자 형제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바람이 실현되었다. 

     

준은 조용하고 말이 없는 반면에 데이빗은 리더십이 있고 밝아서 우리 막내를 잘 이끌었다. 그러나 일주일도 안 되어 영어 캠프는 전면 중단됐다. 어린 학생 중 한 명의 코로나 감염 때문이었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새 정이 들었는지 홈스테이하기 싫다던 아들이 선생님들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교회와 기관에 허락을 받고 두분의 선생님은 우리 집에 한 주를 더 머물렀다. 

     

녹슨 자전거에 기름칠을 하고 대형 마트에서 장을 봐와 함께 요리했다. 집 주변을 산책하고 기타치며 노래하며 영화를 관람했다. 20대의 젊은이들은 우리 아들마냥 병든 닭이 되어 풍경에는 흥미 없어 보였지만, 당진 지역 역사 유적을 찾아 다니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해내며 살고 있다. 때때로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원어민들의 사진을 보고 ‘좋아요’로 답한다. 어디서나 잘살고 있기를 기도한다. 나는 그들의 홈스테이 맘이니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졸지에 많은 자녀를 둔 엄마가 되었다. 누군가 처음 나를 ‘맘’이라고 불렀을 때 비록 닭살이 돋았지만, 일곱 번의 여름 낯선 외국인과 동거하며 헌신한 건, 아마도 그러한 바람 때문이었으리라.  

    

아이들에게 좋은 걸 주고 싶었다. 외국에 어학연수는 못 보내도 영어를 한 마디라도 더 할 수 있는 기회를 붙잡자 생각했다.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며 인연을 만들어 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우리 부부가 조금만 희생하면 아이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나는 영어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도 매년 활용할 수 있는 영어 표현이 늘어났다. 영어는 들으면서 늘었다. 상황이 닥치니 공부하게 되었다. 큰 딸아이는 완벽하지 않지만, 많은 영어 표현을 구사할 수 있다. 둘째와 막내는 영어에 아직 서툴지만 외국인에 대한 어려움이 없고 언제나 마음이 열려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우리의 소중한 추억이다. 평범한 일상이 추억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고 작은 것도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부족한 영어 실력덕분에 뚝뚝 갑자기 끊어지는 대화가 연출하는 어색함 속에서도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홈스테이 최다기록을 세웠다. 우리 집 이야기는 비젼 스쿨 월간지에 실렸다. 2023년 8월 현재. 제15회 JCC 영어캠프가 열렸다. 아이들이 모두 컸고 막내도 중학생이라 해당 사항에 없지만 딸 둘은 자원봉사자 현지인 스텝으로 섬겼다.

     

우리 가족은 프랑스와 캐나다. 미국에서 온 세 명의 원어민과 복잡거리며 생활했다. 멕시칸 아메리칸 마리오, 프렌치 잉글리쉬 벤자민, 캐나다 이민 2세 제이콥이 우리집에 머물다 갔다.               


이전 13화 13. 홈스테이 13년을 기록하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