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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것도 말할 수 있는 용기

나는 내가 좋다, 그리고 나의 '싫어요'도 좋다.

by 김남정

어릴 적부터 나는 착한 아이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선생님을 말씀을 잘 듣는 아이,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아이, 가족이 원하는 대로.

지금 생각해 보면 마음속에서 분명히 작은 파도가 일었음에도 말없이 삼켰다. '싫어요'라는 단어는 내 입 밖으로 한 번도 꺼내지 못한 채, 늘 목구멍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싫은 소리를 삼키는 대신, 웃는 얼굴을 내보였다. 불편한 부탁도 기꺼이 들어주는 척하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게 성숙이고 배려라고 믿었다. 나는 그렇게 착함을 덧칠하며 자랐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깨달았다. '착하다'는 말이 꼭 덕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히려 내 안의 진짜 나를 지우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왜 싫은 것을 말하지 못했을까? 두려움 때문이다. 거절하는 순간, 관계의 문이 닫힐까 봐. 누군가의 미소가 사라질까 봐.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을 늘 희생의 제단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습관을 만든다." 거절하지 않는 습관은 내 삶을 타인의 손에 맡기는 습관이 된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로 했다. 싫은 것도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첫 발자국을 떼는 습관.


어느 날 내 안에서 작은 균열이 일었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상황이었다. 독서모임을 할 때였다. 한 회원이 약속을 미루는 상황이 두어 번 있었다. 그때마다 회원이 책을 읽지 못한 상황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그 회원이 다시 약속을 미루었다. 연거푸 세 번째였다. 나는 그 순간에도 다른 회원과 합의 후 말했다.

"괜찮아요. 다음에 꼭 봐요."

하지만 전화를 끓고 나서 이상한 서늘함이 가슴에 스몄다. '정말 괜찮은 걸까?' 내 안의 목소리가 조용히 물었다.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숨을 멈췄다.


밤이 되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스탠드 불빛이 작은 원을 그리고, 그 바깥은 그림자가 웅크린 어둠뿐이었다. 그림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너는 왜 그렇게 참니? 참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니? 아니면 버려질까 두렵니?"

나는 펜을 쥔 채 대답하지 못했다. 마치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된 것처럼,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한 문장이 떠올랐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심리학자 아들러는 말했다. "인간관계에서의 용기는,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할 수 있는 힘에서 시작된다." 그 문장을 읽고 나는 오래 붙잡고 있던 착각을 내려놓았다. 거절은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유지하는 숨구멍이었다. 내 마음을 무시하는 친절은 진짜 친절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냈다. 처음에는 두려웠다. 마침내 독서모임 회원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속상했습니다. 다음에는 미루지 말고 약속을 지켜 주세요."

놀랍게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회원은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했다.


싫은 것도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은 타인을 밀어내는 벽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울타리였다. 내 마음을 존중하는 첫걸음이었다. 나는 이제 알겠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내 마음을 배신하는 삶은, 결국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문학가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의 자유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자유란, 무엇을 원치 않는지를 말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제 나는 그 말을 조금씩 체화해 간다. 내 마음에 불편함이 스칠 때, 용기라는 작은 불씨를 꺼내든다. 그 불씨는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싫은 것을 말할 때, 나는 조금 더 나답게 살아간다.


혹시 당신도 오늘 누군가에게,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


"나는 내가 좋다. 그리고 나의 '싫어요'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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