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 중 대부분은 중국어 과외교사인 '푸다오'를 직접 구해서 공부하고는 한다. 하지만 나는 푸다오를 따로 구하지 않고 학교에 일정 금액의 돈을 지불한 후 HSK 시험 대비반에 들어갔다. 이 수업은 어학연수생 2명과 교육학과에 재학 중인 중국인 본과 학생 1명을 한 조로 편성해서 한 학기 동안 진행하는 회화위주의 HSK 수업이었다. 어학연수생들은 학교에서 보증해주어 신뢰할 수 있는 푸다오와 수업할 수 있어서 좋고 본과생들은 이 수업으로 학점을 받아갈 수 있어서 좋은 윈윈(win-win) 수업이었다.
대망의 첫 수업 날, 칠판 앞에 본과 학생들을 줄 지어놓고 어학연수생들에게 원하는 푸다오를 선택하게 했다. 나랑 하경 언니는 이 잔인한 푸다오 선택 과정에 말을 잃었다. 특히 나는 이런 상황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더 감정 이입해버리는 파워 ENFJ형 인간이란 말이다! 그래서 '하트 시그널' 같은 연애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보지 못하는 나인데... 내 머릿속에는 '선택 못 받은 학생들은 얼마나 슬플까...'라는 생각뿐이었다. 나약한 나를 보다 못한 반장이 직접 ‘하이닝’이라는 여학생을 나의 푸다오로 정해줬다. 그렇게 나와 하이닝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처음 하이닝과 회화 수업을 하던 내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다행히 하경 언니와 같이 하는 수업이라 언니가 질문을 하고 하이닝이 대답을 하면 나는 사전을 찾는 식의 철저한 분업 시스템으로 수업은 진행됐다. 중국어 실력이 참 많이도 부끄러운 내가 하이닝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조금이라도 사전을 빨리 찾아서 그녀의 기다림을 줄여주는 것뿐이었다. 나중에는 사전을 잘 찾는 나만의 요령까지 생겼다. 자랑은 아니지만 중국어 단어 빨리 찾기 자격증이 있으면 최고 점수를 받을 정도로 사전 찾기 기술 실력 하나는 기가 막히게 늘었다. 그동안 나름 기초 중국어는 꽤 늘었다고 자부했었는데 실전에서 중국인과 대화를 하기에는 내 중국어 실력은 너무나도 하찮았다. 상상 속 중국인과 대화하는 나의 모습은 막힘없이 중국어를 하며 농담까지 주고받는 모습이었는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중국어가 아니라 한국어에 가까운 옹알이뿐이라는 현실은 매일 밤 나를 이불 하이킥 하게 만들었다. 열심히 단어를 찾아서 기껏 말을 하려고 하면 이젠 성조가 헷갈리는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복되는 악순환에 본능적으로 이 수업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나만 쳐다보고 있는 열정 가득한 미래의 학교 선생님을 실망시키는 짓은 죽기보다 하기 싫었으니까.
일주일에 2번, 한 번에 2시간씩 우리들은 만났다. 그렇게 4번 정도 만났을 때, 하경 언니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HSK 수업을 같이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운 좋게도(?) 하이닝을 독점하게 되었다. 하지만 점점 수업을 진행할수록 이건 정말 내가 원하던 수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수업은 한국에서도 들을 수 있는 HSK 시험 대비 수업이 아니었다. 난 중국인 친구와 끝없는 수다를 떨고 싶었다! 내가 하이닝에게 궁금한 말은 HSK 책의 예문인 '그의 직업은 무엇입니까?'따위가 아녔기도 했다. 많은 고민 끝에 우리는 그냥 신나게 놀기로 했다. 하이닝의 조건은 딱 하나였다. 앞으로는 사전을 찾지 말아 볼 것. 이제야 비로소 사전을 눈 감고도 검색할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한 나에게는 너무 가혹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전 없이 하이닝을 만날수록 스스로 할 수 있는 말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다. 전날 수업에서 배웠던 예문도 써보고, 하이닝이 자주 쓰곤 했던 말을 기억했다가 써볼 때도 있었다. 그렇게 우린 많은 대화와 함께 산책을 하고, 북경에서 핫하다는 카페를 가보거나 학교 앞 새로 생긴 현지 음식점을 가기도 했다. 또 송중기의 중국 팬미팅 티켓팅에 도전해 광탈당해 보기도 하고 허한 마음을 달래러 자전거를 타러 가기도 했다. 하이닝을 만나기 전날 저녁마다 '난 내일 또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일까' 걱정하며 잠을 설치던 나는 어느새 중국어로 온전하게 2시간 내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이름 석자만 간신히 외우고 북경에 온 내가 중국어를 이 정도까지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내가 콩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준 하이닝 덕분이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일주일 전이 되었다. 하이닝은 나를 데리고 쇼핑몰로 가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면서 꼭 사가야 하는 중국의 맛있는 간식들을 설명해주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한국에 가져가 내 지인들에게 전해주면 다들 좋아할 것 같아서 샀다며 직접 타오바오에서 주문한 선물까지도 주었다. 우리는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같이 돌려보고 선물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웃으며 안녕했다.
절대 잊지 못할 천사 같은 하이닝, 언젠가는 꼭 다시 볼 수 있길 기대해!
김도희
Ps. 最近很想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