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hler Symphony No.9 in D major
- Claudio Abbado, Berliner Philharmoniker
- 1999.9. 베를린 필하모니홀
Episode.1
말러의 교향곡 9번은 죽음을 향한 작곡가의 마지막 인사처럼 들립니다. 그는 이 곡을 완성한 후, 더 이상 완전한 교향곡을 세상에 남기지 못했습니다. 말년의 병과 상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여냈습니다. 특히 마지막 악장, 즉 느리고 고통스러운 아다지오는 한 음 한 음이 무너지는 육체와 떠나는 영혼의 숨결처럼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처럼 말러가 섬세하게 구축한 감정의 여운이, 공연장에서 단숨에 깨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안다 박수', 즉,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쏟아지는 갈채입니다. 음악이 마지막 숨을 내쉬기도 전에 청중의 박수는 무대와 객석 사이에 놓인 고요를 거칠게 찢어냅니다. 이 박수는 열정의 표현일 수도 있고, 감동을 주체하지 못한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러의 교향곡 9번 앞에서는 그런 박수마저 때로는 폭력처럼 느껴집니다.
Episode.2
1악장은 느긋하고 고요하게 시작합니다. 점점 정서적으로 깊이를 더해갑니다. 말러 특유의 불안한 리듬이 등장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감정의 파도가 일렁입니다. 악장 종결부에 가서는 마치 숨이 꺼져가는 듯 서서히 사라지는 생의 불꽃처럼 마무리됩니다. 즉, 곡 전체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암시합니다.
2악장은 분위기를 달리하여 오스트리아의 전통 춤곡인 랜틀러의 변형으로 시작합니다. 소박하고 시골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지요. 그러나 중반부부터 음악은 점점 왜곡되고 거칠어지며, 랜틀러는 삶의 위선이나 허무를 풍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말러의 블랙유머와 삶에 대한 냉소가 엿보이는 대목이지요.
Episode.3
3악장은 빠르고 복잡한 구조와 함께 강렬하게 몰아칩니다. 말러의 세속세계에 대한 분노와 비판, 혹은 자신을 조롱하는 세상에 대한 반항의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대망의 4악장은 매우 느리고 절제된 장송곡 같은 서정으로 시작합니다. 현악기의 고요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중심을 이루며, 마치 이승을 떠나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네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최종부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소리로 점점 사그라들듯 곡이 끝나는데, 이는 마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순간처럼 느껴집니다.
Episode.4
1999년,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베를린에서 연주한 말러 교향곡 9번은 저에게 있어 음악이라는 예술이 얼마나 인간의 삶과 죽음을 깊이 껴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절대적인 경험 중의 하나입니다. 이 연주는 연주자체로 말할 수 없이 놀라웠고, 마지막 음이 사라진 이후 무려 20초가 넘는 침묵이 정말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남는 감정의 여백"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순간이지요. 그 20초는 말러가 남긴 공백을 가장 깊이 이해한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말러의 교향곡 9번은 단순한 음악 작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작곡가가 삶의 끝자락에서 써 내려간 마지막 편지이며, 특히 4악장의 아다지오는 서서히 사라지는 생명의 숨결을 악보 위에 옮겨 놓은 듯합니다. 현악기의 실오라기 같은 소리가 점점 약해지고, 마침내는 완전한 정적 속으로 가라앉을 때 그 공간에는 어떤 말이나 박수도 개입할 수 없는 것입니다.
Episode.5
아바도는 이 곡의 내면을 그 누구보다 절제된 방식으로 펼쳐 보였습니다. 그는 말러의 고통을 과장하거나 감정을 파도로 연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무대 위에서 음악이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한걸음 물러나 있었고, 그 결과 청중은 음악이 끝나는 과정을 살아있는 존재처럼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관객들도 그에 호응하였습니다. 그들은 박수를 치지 않았습니다. 아마 손을 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요. 그 침묵은 단순한 예절이 아닌 음악의 마지막이 온전히 우리에게 닿기까지 필요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20초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말러와 함께 죽음을 응시하고, 감정을 수습하고, 다시 삶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클래식 공연에서의 '안다 박수'를 예의 문제로만 봅니다. 하지만 말러의 9번 교향곡, 특히 아바도와 베를린필의 1999년 연주를 경청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단순한 매너의 문제가 아님을 압니다. 그 침묵은 연주의 일부이며, 때로는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마지막 악장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