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촉(觸) I 아버지 기일(忌日)

병상일지 10

by 박상진

평소에는, 광명에 살고 있는 어머니에게 거의 날마다 문안(問安) 인사를 올린다. 아버지가 이태전 유명(幽明)을 달리하신 이후로 대구 본가에서 혼자 지내기가 무료(無聊)하다 하여 큰 여동생이 광명으로 모셔 온 것인데, 여동생은 중학교 교사이고 올해 제매(弟妹)는 때맞춰 정년(停年)을 맞았다. 산행과 낚시를 좋아하는 제매는 정년을 한 이후로 연초부터 며칠씩 집을 비울 때가 많았다. 게다가 큰 딸은 올 3월 신학기에 유아교사로 임용(任用)이 되어 동탄 신도시의 원룸에 살고 있고, 막내는 군에서 복무(服務) 중이다. 여동생이 퇴근할 때까지 이래저래 홀로 지낼 수밖에 없는 어머니에게 날마다 전화로 아침 문안을 올리는 것이 내게 있어 부득불(不得不) 자연스러운 관행(慣行)이 되어버렸다.


며칠 사이 전화를 드리지 못했다. 입원을 하고 포항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응급차에 실려 영남대학교 병원으로 전원(轉院)을 왔다. 하지만 몸은 힘든 가운데서도 정신은 더욱 또렷해져, 다가오는 토요일의 아버지 기제사(忌祭祀)가 한층 더 걱정스러워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버지보다 3일 앞선 여동생 시어른 기일 하루 전에 제매가 어머니를 대구로 모셔오면, 수요일 당일 대구 본가로 가서 그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제수(祭需) 준비를 하기로 했었다.


그러던 차에 수요일 당일 대구로 이동 중에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대뜸, 어머니의 말씀이 마치 날 선 송곳처럼 귀를 찔러왔다.


"야야! 니 어디 아프나? 내 지금 대구 다 와가는데 오늘 칠곡으로 오기는 오는 거냐?"


전날,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드리면서 아버지 기일에 참석하지 못할 상황을 두고 동생들과 한 가지 묘안(妙案)을 짜냈다. 코로나 환자로 둔갑을 하기로 한 것이다. 아내는 간병(看病)을 해야 했으니 함께 발병(發病)한 것으로 하고, 부득불 여동생들이 어머니를 도와 아버지 제사를 모시기로 하였다.


"어무이, 그저께 몸이 불편해서 코로나 검사를 받았더니, 그만 양성이 나와 뿌맀네요. 삼촌이 어무이를 도와 아버지 제사를 모실 테니 올해는 섭섭지만 우짜겠능교?"


말을 이어가다가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격한 감정이 일어났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목소리는 떨렸고 속마음을 숨기려고 일부러 헛기침을 해 봐도 건네는 말에 축축한 습기가 돌았다. 불현듯 아버지가 그리웠고 어머니에겐 죄스런 마음이 솟구쳤다.


"괘않다. 너거 아부지도 이해하실 거다. 부디 몸조리 잘하고, 아플 동안에는 집 밖 나들이하면 큰일 난데이. 며느리도 잘 보살펴 주고. 이제부터 제사 걱정은 말거라, 알았제?"


어머니가 전화를 끊으면서 건네는 말씀에도 잔떨림이 묻어났다. 예순을 훌쩍 넘겼다 하나 내 뱃속으로 몸을 틀어 낳은 애틋한 자식인 것이다. 여태까지 잔병치레조차 없었던 아이가 물기 배인 목소리로 병치레를 하고 있다. 어머니의 촉은 사실 그 너머까지 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목요일 아침 우리 병실에서 PCR 검사가 있었다. 얼핏 전해 들은 바로는 PCR 검사를 받지 않고 전날 입실한 환자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환자는 입구 쪽 병상이었고, 나는 창가 쪽 병상에 있었으니 감염(感染)의 위험성이 덜할 거라고 스스로 자위(自慰)를 했다. 하지만, 금요일 오후가 되자 상황이 급박하게 변했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더니, 병실에서 나만 코로나 양성 판정이 난 것이다. 어이없게도, 전날 여동생들과 짜두었던 각본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버지 기일인 내일부터 7일간 코로나 병동에 격리(隔離)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간병을 하고 있던 아내의 몸상태가 더 걱정스러웠다. 당장, 포항으로 가서 보건소에서 PCR 검사를 받아야 했지만, 코로나의 여러 예후(豫後) 증상으로 봤을 때 코로나에 걸렸음이 분명했다.


아내를 내보내고, 흰 장막(帳幕)을 사방으로 드리운 휠체어에 앉으니 만감(萬感)이 교차했다. 격리병동으로 보내진다 하니, 멀뚱멀뚱 병상에 누워 고통에 휩싸여 있을 내 처지가 머릿속으로 생생히 그려졌다. 내일이 아버지 기일인데, 뇌간(腦幹)이 막혀 호흡기에 의존해 요양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현재의 내 처지와 오버랩되었다. 죽음과도 같은 불면의 까만 밤이 마구 엄습(掩襲)하는 듯했다.


간단한 소지품과 함께 휠체어 실려 이동한 곳은, 같은 호흡기 병동의 3층이었다. TV를 통해서만 보았던 방호복(防護服)을 입은 간호사들이 격리병동 입구에서 나를 맞아 주었다. 여전히 목은 아프지 않았지만, 이전의 폐렴으로 인한 열기와는 다른 체열이 으슬으슬한 통증과 함께 온몸으로 뻗치고 있다는 것이 이전과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격리 병동의 코로나 음압실로 입실한 것은 아버지 기일 바로 하루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