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4코스는 임랑해변에서 진하해변까지의 19km 구간이다. 임랑해변을 출발해 작은 간이역이었던 역사를 새로 크게 지은 월내역을 지난다. 신리항까지는 고리원자력발전소가 자리잡고 있어 봉태산 산자락을 넘어 돌아가야 한다. 중간에 미나리꽝을 만나 탁트인 기분을 느끼기도 하지만 개훈련장이 있어서 개들이 일제히 짖어대는 길을 통과해야 하고 원자력 발전소 인근의 인적없는 길을 걷기도 해야 한다. 신리항을 지나 신암리 유물출토 안내판을 만날 수 있으나 쓰레기로 지저분한채 관리가 되지 않은 안내판은 실망감을 준다. 간절곶을 들러 박제상 부인의 이야기를 읽고 곰솔숲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송정공원을 지나면, 저기 명선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진하해변이다.
잘 살고 있는 거니(임랑 해변- 월내역-길천 교차로-봉태산-신리항)
임랑 해변에서 출발해 월내로 향한다. 해파랑길은 월내 방파제 앞에서 월내역으로 가야 하나 지금 월내역을 새로 짓느라 공사 중이어서 걷기가 어렵다. 3년 전 이 길을 걷던 겨울 그때는 하루의 일정을 월내역에서 마치고 역사의 흐린 연탄불 난로에 기대 기차를 기다렸었다. 그때는 춥고, 배고파 힘들었는데 지금은 아련한 추억뿐이다.
장안천의 월내교 아래에서 물닭들이 청둥오리와 섞여 헤엄치고 있다. 본능적인 걱정, "너희들 먹는 건 잘 먹고 사니? 원전 근처에 사니 힘들지는 않니?" 내가 뭐 하는 거지. 참 철딱서니 없다. 길천 교차로에는 원전 일을 외주화 해 생존에 위협을 느낀 이들이 걸어 놓은 현수막이 더 절실해 보인다. 고리 스포츠 문화센터 앞길에서 샛길로 들어선다. 고리 원전 앞으로는 걸을만한 길이 없기 때문에 봉태산 산자락을 타고 돌아가는 것이다. 산자락은 야트막해서 넘어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는데 올해는 소나무 재선충 때문에 나무를 자르고 약제로 훈증을 해놓아 냄새가 지독하다. 나중에 이곳에서 난 임산물을 먹어도 되는 걸까? 잠깐 걸었는데도 목이 아프다. 봉태산 자락의 중간쯤에 송전탑이 있는데 이 송전탑을 지나면 울산이다. 봉태산 자락이 끝나는 곳에는 개 훈련소가 있어 산을 내려가기 전부터 개들이 짖어 댄다. 정말 이곳은 올 때마다 적응 안 되는 곳이다.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근처에 있는 고경사에서 써놓은 입간판이 눈에 띈다. '오는 길을 알면, 가는 길을 안다.' "참 선문답 같은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월내 해안길에서 바라본 아침 풍경. 멀리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보인다(좌). 장안천 하구를 건너는 월내교에는 물닭들이 헤엄치며 먹이를 찾고 있다(우). 산자락을 내려와서는 효암천을 따라 걷는다. 하천 제방길이 다 그렇듯 시멘트 포장도로이지만 겨울에 이 길을 걷는 맛이 꽤 쏠쏠하다. 효암천 옆에 있는 넓은 미나리꽝들 때문이다. 오늘도 오전부터 나와 미나리를 수확하느라 바쁜 이들이 있다. 겨울의 찬물 속에서 가슴장화를 신고 일하는 이들 앞에서 내가 누가 되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효암천은 위양천과 강월교 앞에서 만나 바다로 가는데 위양천으로 가는 길은 별로 즐겁지가 않다. 위양천의 중간인 명산리에서 신리로 꺾어지는 곳에 음식점 앞에서 원래 있던 시멘트길을 흙을 쌓아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어찌어찌 지나가기는 하는데 남의 집 담 넘어가는 기분이다. 사유지라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빨리 노선이 조정되어야 할 곳이다. 문제는 그러려면 마을로 길을 더 돌아가야 하는데 그게 쫌 그렇다. 이곳을 지나면 배나무 과수원이 나오는데 농사를 짓지 않는 곳들이 있어서 황량하기 그지없다. 신리삼거리까지 꾸역꾸역 걸어와도 원전 옆길의 차들이 쌩쌩 달리는 위험천만한 길을 걸어야 하는 것까지 하면 이 구간은 정말 답이 없다. 신리항에 다가와 곰솔 노거수와 서낭당을 마주하면 안도의 숨을 쉴 수 있다.
한겨울 미나리꽝에서 미나리 수확에 열중하고 있는 두 사람 길가에서 만난 배나무 과수원(좌). 물이 조금씩 차있는 논 가에는 햇살이 따뜻하다(우).
신리의 곰솔과 서낭당역사를 막 지우는 건 아니잖아(신리항-신암리-나사해수욕장-해돋이 카페)
조용한 신리항을 걷는다. 길가에 아구 비슷한 생선을 갈라 뒤집어 놓았는데 그게 잘 모르겠다. 아직 점심때도 아닌데 식욕이 돈다. 계단을 따라 남의 집 앞마당 같은 길을 지나가면 바위들이 많은 바닷가를 걷는다. 신리어촌계에서 세운 출입 금지 안내판 위에 해파랑길 화살표가 붙어 있다. "그래, 너를 믿고 가야지." 신암리가 보이는 바위틈에 앉아 바닷물에 발을 담그니 발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피로가 다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바위 위에 앉아 발을 말리는데 어디선가 무당벌레 한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이 겨울에 너는 뭘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신암리의 바닷가를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것이 신암리 서낭당이다. 담을 노란 형광색으로 칠하고 기와가 얹혀 있는 서낭당은 왠지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을 들게 한다. 서낭당에는 성황토지신의 신위와 할배와 할매신위가 모셔져 있다. 신위 옆 구석에는 자개 여닫이장과 오래된 나무 상자가 놓여 있다. 당에는 축문과 제수비용이 적혀 있는 종이들이 있고, 여닫이 장에는 한지와 양초 등이 들어 있다. 서낭당의 시멘트 마당 위에 어럽게 서있는 두 그루의 동백들이 꽃봉오리를 달고 있는데 인터넷 세상의 개발 바람 앞에서 어렵게 자리를 잡고 있는 서낭당의 모습이 겹쳐져 씁쓸하다. 서낭당 옆에는 바닷가 한옥을 수리해서 카페로 만든 '간절바당' 이 있다. 인터넷에도 유명한 집으로 많이 알려진 곳이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서낭당을 찾아 마을의 문화와 어부의 삶을 알 수 있도록 보완을 해 일부를 공개하는 건 어떨까. 신성을 해치지 않는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젊은 사람들이 낡고 오래된 것이나 미신이라는 생각을 깨야 문화로서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방파제 안쪽의 길가에서 해녀 할머니들이 물질에서 돌아와 성게를 쏟아 놓고 알을 빼고 있다. 마을 서낭당에 대해 이것 저거 물어보는데 할머니들 대답은 해주시는데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일어섰다. 한 할머니가 잡은 해물을 굽은 등에 잔뜩 짊어지고 힘겹게 집으로 가고 있다.
신암리 서낭당의 모습(좌)과 바닷가에 앉아 있는 나를 찾아온 무당벌레(우)
성게의 알을 까고 있는 해녀 할머니들 바닷가 주택단지 앞에 신암리 유적지를 표시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일대에서 1935년 줄문토기가 출토된 이후, 1966년, 1974년, 1989년에 조사가 이루어져 흙으로 만든 여신상을 비롯해 토기, 석기 등 다양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안내판이 세워진 자리는 신고리 원전 3.4호기 전원개발사업 이주단지를 조성하면서 융기문토기와 작살, 낚싯바늘 등이 출토된 곳이다. 유물이나 유적지를 보면 정신을 온통 빼앗기는 성격 때문에 이런 안내판만 나오면 이동이 어렵다. 벌써 여러 번 찾아온 이곳이지만 한참을 안내판 앞에 서 지저분하게 쓰레기가 버려진 안내판 주변을 보다 보니 유적 출토지에 18채의 멋진 집을 지으면서 수천 년의 역사를 품었던 기억을 이렇게 박대해도 되나 싶어 진다. '나도 참 아무데나 끼려 하는 이 병을 어찌할까.'
툴툴 자리를 털고 길을 걷는데 개 한 마리가 따라온다. 혼자 걷다 보면 이런 일이 종종 있다. 길에서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대상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가지고 있던 사탕을 하나 까서 주었다. 그런데 개한테 사탕을 줘도 되는 건가? 쫄래쫄래 나의 꽁무니를 따라오기도 하고 또, 자기가 먼저 길을 안내하기도 하던 이름 모를 개는 나사 해변으로 들어서자 어디론가 가버린다. 나사 해변에서는 물고기 이름 공부를 벽화를 통해 할 수 있다. 기념사진을 찍도록 만들어진 등대 앞에 서니 갑자기 배가 고파진다. '12시가 넘었는데 점심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서고 밥 먹을 데가 눈에 띄지 않는다. 청조수퍼 언덕에 있는 서낭당도 볼 겸 옆골목으로 빠져 걸어간다. 바다 마을의 뒷골목은 대부분 폭이 좁고 지붕보다 높은 경우가 많은데 그 덕분에 바다를 보는데도 문제가 없다. 마을의 앞바다에는 양식시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굴인가? 전복인가? 아니면 가리비?' 뭐든 상관없다. 해돋이 카페 근처에서 물질하는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오늘 참 날이 좋긴 좋은가보다."
신암리 신석기시대 유적지. 이 일대에서 출토된 진흙인형이 유명하다 나사해변의 물고기 설명(좌)과 포토존이 설치된 등대(우) 마음도 따라 간절(해돋이 카페-평동 방파제-간절곶-송정방파제)
곰솔이 숲을 이룬 언덕을 넘는데 인도가 없어 걷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차는 많이 다니지 않는다. 여름철엔 조심해야 할 일이다. '간절곶 강장 집'에서 강장정식을 먹었다. 밥 한 공기보다는 찬이 훨씬 많은 식사가 만족스러웠다. 배고프면 무엇이든 맛있는데 입에 맞는 반찬들이 있으면 밥 한 공기를 더 먹게 된다. 햇빛 잘 드는 넓은 인도에 무를 잘라 말리고 있다. '무말랭이 무침을 먹어 본 게 언제였지?' 물이 빠진 무는 아삭함은 없지만 오도독 거리는 식감을 오랫동안 두고 즐길 수 있다. 살면서 조금만 어깨에서 힘을 빼면 두고두고 매력을 낼 수 있을 텐데. 나는 생무처럼 매운맛은 있지만 상큼하지 못했고, 힘을 빼지도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내 삶이 자신 있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 어눌하고 과감히 떠나지도 못하는 나약함 때문이다. '에휴, 인생아 왜 이러니.'
저 앞에 간절곶이 보이는데 길가엔 익숙한 풀 같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잘 익은 아주 작은 고추 같은 열매가 달리는 구기자다. 피로회복에 좋고 베타인이라고 하는 물질이 있어 지방간에 효과가 있는 식물이다. '그런데 이게 왜 여기에 있지?' 그것도 수십 개 정도가 아닌 엄청 많다. "누가 재배하는 건가?" 열매가 별로 없고 다 딴것처럼 보이는 게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 글쎄 모르겠다. 나는 몸이 찬 편이어서 구기자보다는 쑥이 맞는 사람이니 그냥 가자.
등 뒤에 곰솔숲을 세우고 든든히 서있는 간절곶 등대가 보이는 곳엔 좀 더 가깝게 가려는 사람들이 길에 차를 세워 놓고 바닷가를 걷는다. 언제 와도 간절곶을 찾는 사람들은 끊이질 않는다. 간절곶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신라의 19대 왕인 눌지왕의 셋째 아들인 미사흔을 구출하고 돌아오지 못한 박제상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간절하고 애가 끊어지는 이야기 때문에 간절의 뜻이 간절함인가 싶지만 그렇지는 않다. 간절(艮絶)은 감이나 밤 같은 열매를 딸 때 사용하는 대나무로 만든 긴 장대인 간짓대를 말한다. 해안에서 바라볼 때 간절곶의 생긴 모양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어쨌든 짝을 이뤄 온 이들은 희망우체통 앞에 서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두 손을 꼭 잡는다.
원양어업개척비를 지나 드라마하우스 앞을 지난다. 바다는 여전히 절경이고 커피라도 한잔 마실까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 커피를 마시면 드라마하우스를 무료로 볼 수 있다는 게 더 당기는 거였지만 오늘이 걷기 3일째, 내일은 집에 가야지 싶은 마음에 길을 계속 간다. 솔밭을 넘어 송정방파제가 보이는 파도치는 바위길로 접어드니 '소머리 밀회'라는 작은 안내판이 있다. 바다와 맞붙어 있는 산의 모습이 소머리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배낭꼴, 사다리꼴, 수다뜰의 세 바위골짜기가 외져 이곳에서 밀회를 나누는 건 덤이라고 한다. "음. 정말 오는 사람은 없다."
길가에 무리지어 자라는 구기자(좌)와 간절곶의 등대(우)
내가 가서 길이다(송정방파제-송정공원-진하해수욕장)
바다를 바라보는 송정공원에서 화장실에 들렀다. 누군가 의자에 앉아 색소폰을 부는데 절로 따라 흥얼거리게 한다. 바람구멍인지 세로로 내놓은 화장실 창 틈으로 곰솔 숲이 보이고, 그 사이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명퇴하고 여유가 있는 분인가?' 화장실을 나와 공원을 걷는데 공원에 세워 놓은 기념돌의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 길이 있어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으로써 길이 생기는 것이다. " '그래, 나도 동감이다. 이제 다시 간다.'
솔개해수욕장에는 파도를 타는 보드를 울타리로 꽂아 놓았는데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라 그런지 독특하다. '망가진 걸 꽂아 놓은 거겠지?' 모래사장을 지나 바위들이 오손도손 서있는 해변에는 신랑각시바위가 있다. 이렇게 경치 좋은 곳에 서 있으니 마치 신혼여행이라도 온 것 같다. 이 바위지대는 진하해수욕장과 솔개해수욕장을 구분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바위지대의 끝부분에 있는 대바위공원에서 보니 진하해수욕장의 솔밭이 눈앞에 펼쳐진다. 진하해수욕장을 알리는 빨간 이니셜이 세워진 곳에 빨간 옷을 입은 어린 남매가 앉아 있다. 일부러 맞춰 입고 온 것은 아닐 텐데. 아이들이 예뻐 보이는 건 만국 공통이다. 가끔 그렇지 못한 어른들이 있어 세상이 흐려지긴 하지만, 아이들의 맑은 영혼이 어른들의 두터운 때를 지워 주면 좋겠다. 진하해수욕장의 모래사장 끝에는 한 뼘쯤 육지와 떨어져 있는 명선도가 보인다. 물이 빠지면 섬으로도 들어갈 수 있고, 5분 정도 거리를 걸어볼 수도 있다. 섬에는 곰솔과 2m 내외의 수목들이 자라고 있는데 섬에서 많이 자라는 이대인 것 같은데 확실치가 않다. 휴대폰에 찍힌 사진 역시 상을 왜곡시켜 알아보기가 어렵다. 인터넷에 올린 이미지를 찾아보니 대부분 일출 사진밖에 없다. "이것도 편식이다." 혼자 중얼거리는 내가 신기했는지 할머니 한분이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신다. 할머니는 바다를 보시며 끌탕을 하신다. 바다에는 갈매기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 아, 저 갈매기들이 고기를 다 잡아먹잖아." 해수욕장 앞으로 와야 하는 물고기들이 갈매기들 때문에 오지를 못해 낚시꾼들이 허탕만 친다고 하신다. '동희식당' 사장님이신 할머니는 손님이 오지를 않아 다들 문을 닫고 있다고 한숨을 쉰다. "비수기라 그런가요? 할머니는 왜 안 쉬세요?" " 뭐 할 일도 없는데 문이라도 열어야지." 웬만하면 이곳에서 자고 갔으면 좋겠는데 이제 3시 밖에 되지 않았다. '아, 더 가기로 했지.'
길에 대해 바위에 새겨 놓은 글(좌)과 송정공원의 모습(우)
진하해수욕장의 곰솔숲에서 바라본 명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