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2코스는 미포에서 기장 대변항까지의 15.2km구간이다.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송정해수욕장 구간은 문텐로드로 불려지는 달맞이고개와 산길을 걷는 코스이지만 해운대해변열차가 개통되면서 노선이 바뀔 것으로 여겨진다. 해변열차의 철길 옆으로 탐방로도 함께 조성되어 바다향을 맡으며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수항의 서낭당과 몇년에 한번씩 열리는 용왕제는 이곳의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이제는 부산의 대표 관광지가 된 해동용궁사와 오랑대를 지나면 대변항에 이르게 된다.
달빛을 탐하다(해운대해수욕장-달맞이고개-송정해수욕장)
해운대구 관광안내판 앞에서 2코스를 시작한다. 시간을 보니 4시 25분이다. 바다 위에 걸려있는 해가 저녁 햇살을 뽑고 있다. 걷는 도중 해가 떨어질 것이 확실하지만 오늘 송정까지는 가기로 한다. 2코스 출발지점엔 스탬프가 안 보인다. 스탬프를 찍지 않는다면 괜찮지만 찍는 이들은 종종 당황한다. 스탬프는 관광안내소 건물 안에 있으니 당황하지 마시길. 조금 걸으니 동해남부선 폐철도가 있는 구간엔 공사가 한창이다. 곧 관광용 열차가 놓일 예정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엔 이미 개통이 되어 한번 다녀왔다. 열차와 함께 나란히 바다 옆으로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어 앞으로 이 구간의 주 탐방로가 될 것이다.
달맞이고개를 오르는 길에 카페로 보이는 건물 앞에 잘 다듬어진 향나무가 서있다. 강원도 거진에서 자라던 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라고 한다. 향나무의 수령이 500년이라고 하니, 1520년인 조선 성종 때는 강원도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자랐을 것이다. 지금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고향이 강원도 고성인 500년 된 향나무의 모습. 수형이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나무이다
해운대에서 송정해수욕장까지 폐철로를 복원해 조성한 해운대해변열차.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30분 정도 기차여행을 할 수 있다.
청사포 다릿돌전망대(2020년 11월)
해운대해변열차 철로 옆으로는 걸을수 있는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다
봄이면 고개에 벚꽃을 한가득 피울 왕벚나무 가로수를 따라 걷다 곰솔 숲으로 들어선다. 이제부터는 달빛을 밟으며 걸을 수 있다는 문텐로드이다. 고개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길의 모습과 참 잘 어울린다. 포장되지 않은 길이라 좋고 겨울에도 잎이 푸른 털머위가 나무 아래 함께 자라고 있다. 날이 어둑해지자 길을 따라 발치에 설치한 조명등에 불이 들어온다. 좋~다. 바다 쪽에 웅크리듯 자리 잡은 청사로를 바라보며 가로등이 없는 산길로 접어든다. 어둑한 산길에서 만나는 집터나 군인들이 파놓은 참호는 그나마 사람의 흔적을 확인하게 한다. 5시 반이 넘으면서 겨울 산길엔 짙은 어둠이 내린다. 바다에 설치한 전망대는 멀리 바다에 떠서 불을 밝히고 있는 어선들을 향해 헤엄쳐가는 큰 물고기 같다. 어두운 산길을 더 이상 갈 수 없어 바다 쪽으로 내려오니 잘 만들어진 데크길이 놓여 있다. 철길 공사가 다 끝나면 미포에서 송정까지 바다를 따라 걷는 길로 코스가 바뀔 것이다. 데크 아래쪽으로 어른 한 사람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바닷가 바위에는 촛불을 켜고 기원을 하는 여성이 추운 바람이 무관하게 열심히 무언가를 빌고 있다. 송정해수욕장 주변에 설치한 조명들로 밤바다는 푸른 물이 들었다. 문을 연 대구탕 집을 들어가 맑은탕을 시켰다. 뚝배기에서 보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대구탕 국물을 떠먹으니 몸이 녹는다. 더 이상 길을 걷기엔 늦었다 싶어 숙소를 잡는다. 모텔은 나무가 많이 드러나게 꾸민 방인데 새장에 황금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황금새면 뭐할까. 먼지가 잔뜩 쌓인 가짜 새의 모습이 별로다.
문텐로드에 어둠이 내리면서 발치의 불들이 하나 둘 들어올 때마다 마음에 한줄기의 빛이 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두운 밤길 가까이 구덕포와 멀리 송정해수욕장의 불빛이 길을 안내한다
처음 만난 해신당(송정해수욕장-공수항)
아침을 굶고 송정항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한다. 배들의 모습이 너무 조용하다. 어젯밤에 빛나던 배들 중의 하나일까. 밤을 새운 어부들은 일을 마치고 집에서 쉬고 있을 것이다. 송정항을 지나가면 공수항이 기다린다. 해파랑길의 대부분을 걸었지만 코스별로 차례로 걸은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걷다 보니 전체적으로 이어진 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작정하고 차례로 전구간을 걸은 것이 3년 전이다. 30일에 걸쳐 느리게 걷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걷기도 하면서 길의 윤곽을 발로 익혔다. 그때는 길에 어떤 이야깃거리들이 있나 눈에 불을 켜고 길을 걸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들인지 꼼꼼히 챙겨보고 싶었다. 혼자 걷다 보면 오만 잡생각이 다 들다가도 어느 순간 마음에 평정이 찾아오는 것을 여러 차례 느꼈기에 이번 기회에 그 감정의 결들을 손으로 쓰다듬듯이 느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왠지 길을 걷는 거리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코스에서 만나는 서낭당들을 함께 살펴보기로 했다. 서낭당을 보는 이유는 마을에서 보호해온 서낭당 주변으로 고목이나 숲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내가 걷는 길에서 만나고 싶어 하는 주연 중의 하나가 나무이다. 동해안은 거친 동해바다에 의지해 살아가는 어촌마다 용왕과 동신을 모신 해신당이 있다. 해파랑길 1코스에서는 부산시내 한복판의 개발지여서 그런지 서낭당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2코스부터는 서낭당이 나타나는데 청사포 마을의 뒷산에 첫 번째 서낭당이 있고, 공수마을의 서낭당이 두 번째이다.
공수마을 안의 수호신 사당인 할매서낭당. 사당 주변의 팽나무 수관의 모습이 아름답다
공수마을 수호신 사당은 공수항 옆 소나무숲이 있는 바닷가와 마을 안 두 곳에 있다. 이럴 경우 대개는 마을 안쪽이 상당, 바다 쪽이 하당이어서 마을 쪽을 할배당, 바다 쪽을 할매당이라고 하는데 마을분에게 물으니 바다 쪽에 있는 사당은 할배서낭을 모시는 곳이고, 마을은 할매서낭을 모신다고 한다. 또 다른 분께 물어볼 여유도 없어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언제고 다시 확인해 봐야 한다. 당제는 음력 1월 15일에는 할배서낭당에 지내고 음력 6월 15일에는 할매서낭당에 제를 올린다고 한다. 할매서낭당은 공수항에서 보면 집들 사이로 좋은 수형의 나무가 보이는 곳이다. 좁은 골목을 따라 올라가니 서울 택시의 꽃담색 같은 페인트를 칠한 할매서낭당이 보인다. 공수마을 수호신 사당이라고 써 놓은 뒤편에 서있는 팽나무가 신이 계실만하다 싶게 생겼다. 당집 앞에 네모난 담장을 쌓아 공간을 만들어 놓은 독특한 형태이다. 서낭당을 가도 문이 잠겨 있으면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더욱이 갈길이 먼 걷기에선 마을 주민의 양해를 구해 보기도 어렵다.
서낭당 옆의 돌담 안에 마당의 대부분을 밭으로 꾸며놓은 집이 왠지 끌려 한참을 담장 밖에 서서 바라보았다. '저런 집에서 살면 어떨까? 이것저것 때우고 풀 뽑는 일이 성가실까? 아니면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여유를 부리며 뒹굴거릴까?' 대문도 없는 돌담집에서 사는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집안을 정리해 놓은 것을 보면 꽤나 바지런해 잠시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사람의 손길이 느껴진다. 집을 나와 내친김에 할배서낭당까지 보고 가기로 했다. 공수항 옆의 나지막한 봉우리에는 곰솔이 숲을 이루고 있다. 숲 사이로 지워질 듯 남아 있는 사람의 자취를 쫒아 봉우리를 넘으니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마을의 서낭당과 같은 색의 시멘트 건물로 이루어진 서낭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서낭당 앞에 곰솔나무와 팔손이가 덤불처럼 우거져 있다. 바다에는 양식장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서낭당 근처에 누군가 박스를 여러 개 가져다 놓고 그 옆에는 사료를 놓아두었다. 자세히 보니 상자 위에는 고양이가 한 마리 앉아 있다. 길냥이들을 생각하는 따스한 마음을 가진 이들의 손길이 바닷가까지 미치고 있었다.
잊혀져 가는 시랑대(공수항-해동용궁사-힐튼호텔-오랑대-대변항)
서낭당이 있는 공수항을 떠나 시랑산이 보이는 해안가에 이르자 '공수어촌체험마을 후릿그물체험장' 안내판이 나온다. 후릿그물은 배에서 그물을 치고 육지에서 그물의 양쪽을 끌어 그물 안에 걸린 고기를 잡는 지인망(地引網)의 한 종류이다. 조선시대부터 '휘리(揮罹)'라 부르며 사용하던 어업이다. 안내판의 사진 속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티를 맞춰 입고 후릿그물을 체험하고 있다. 원래 노선은 이곳에서 시랑산의 바닷가 곰솔 숲을 걸어 시랑대를 거쳐 해동용궁사로 빠져나갔었는데 길을 따라 해동용궁사로 직접 넘어가도록 바뀌었다. 건물이 들어서려는지 산을 깎는 공사현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넘으니 해동용궁사를 찾아온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길가에 식재된 개나리 끄트머리에 노란 꽃이 여러 개 피어 있다. 1월이 무색해진다. '남쪽은 남쪽이구나.' 십이지신상 석물이 입구를 지키는 해동용궁사는 이제 북적거릴 정도로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대나무 그늘길을 지나 약사여래불 양옆에 서있는 음향수(陰香樹)와 양향수(陽香樹)를 만나 안부를 묻는다. 향나무는 암그루와 수그루가 따로 있는 자웅이주이지만, 암꽃과 수꽃이 함께 달리기도 한다. 국립수산과학원 담장길 옆 공간엔 사람들이 쌓아 놓은 돌탑들이 빼곡하다. 사람들이 북적 대는 곳을 피해 오다 보니 해동용궁사 뒷길로 돌아가야 볼 수 있는 시랑대(侍郞臺)를 그냥 지나쳤다. 시랑대는 1733년(영조 9)에 시랑직인 이조 참의를 지낸 권적(權樀)이 기장 현감으로 부임해 바닷가에서 놀고 바위에 글자를 새겨 놓았다. 이곳은 널찍한 바위 옆의 터에 앉아 바다를 보는 맛이 꽤 괜찮다. 원래는 시랑산을 돌아 해동용궁사로 지나가게 되어 있는 길인데, 지금은 접근이 어려워 다른 길로 돌아가게 되었다.
해동용궁사의 약사여래불과 쌍향수. 보통 암수딴그루인 향나무의 특징을 보여주는 음향수와 양향수
시랑대로 가는 해동용궁사 뒷길과 시랑대전경(2017년 1월)
동암항은 주소가 시랑대의 이름을 따라 지은 시랑리이다. 길가에 음료수 자판기를 설치해 놓았는데 가정집 담장의 노랑과 분홍으로 칠해진 벽면이 촌티가 나면서도 따스한 느낌을 준다. 동암항을 지나면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힐튼호텔이다. 아직은 마무리가 안되어 흙길에서 먼지가 올라온다. 앞으로 이 길을 지나려면 호텔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건가? 바..다에는 바위가 갈라지며 독특한 무늬를 만들어 놓은 벌너리바위가 있다. 바위가 보이는 곳에 앉아 쉬는데 호텔 이용객들이 바닷가로 몰려나온다. 혼자 걷는 차림이 어색해 벗었던 신발을 다시 신고 길을 재촉한다. 거북바위를 지나 곰솔 숲길을 잠깐 걸으면 오랑대가 나온다. 다섯 명의 사내가 바닷가 벼랑에 앉아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전설을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은 근처의 해광사에 지은 용왕단이 더 눈에 들어온다. 바닷가에는 두 남녀가 제를 지내고 있다. 저들도 용왕을 대상으로 하겠지.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아쿠아맨을 만들어 바다의 신을 재해석하고 있는데, 우리의 용왕은 흰 수염에 용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만 떠오른다. 웹툰의 원조인 나라이니 이제 웹툰에 다양한 용왕의 이미지를 기대해보면 될까. 오랑대를 지나 공터에 수령이 많지 않지만 바다와 잘 어우러지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두 갈래로 갈라진 가지가 바다를 품고 있는 것이 제법이다. 나무든 사람이든 어떤 경우에는 연륜보다는 타고난 본성이 빛나는 존재들이 있는가 보다.
대변항은 장승등대로 유명한 곳이다. 찻길을 따라 만들어진 탐방로를 걸어 대변항에 들어선다. 마침 사람들이 많이 찾는 짬뽕집이 눈에 띄어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가리비, 전복, 동죽, 바지락, 낙지, 꽃게 등 다양한 수산물이 들어간 것이 맛이 괜찮았다. '음, 가성비로 보면 아주 좋다.' 걸으며
?93 맛집을 찾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고 보니 상호가 '오가다 짬뽕'이다. 햇빛을 받으며 터덜터덜 대변항으로 들어간다.
오랑대가 있는 바닷가의 용왕신을 모신 제단. 사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멀리 대변항으로 가는 입구의 서암방파제 앞의 등대가 보이는 곳에 외로이 서있는 두 갈래의 가지로 갈라진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