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1코스는 부산 오륙도 앞에서 시작해 미포까지의 17.8km의 구간이다. 출발지점에서부터 오륙도와 이기대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설렘의 길이다. 광안리와 해운대의 해수욕장은 사계절 사람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부산의 명소이다. 길을 시작한 첫날의 기대를 채워주기에 부족함이 없고, 넘치는 의욕을 적당히 달 래줄 수 있는 길이를 갖추기도 했다.
여정의 첫걸음(서울역-부산역-오륙도 스카이워크)
자는 둥 마는 둥 새벽이 되었다. 길을 떠나는 날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빈 골목길을 나가 탄 버스에는 사람이 없다. 새해 첫날 새벽부터 일하러 나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탄 부산행 열차에도 한동안 사람이 없었다. 자가용 열차를 타고 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괜찮았다. 한강을 건너는 열차의 차창 너머 보이는 서울은 밤을 꼬박 새웠는지 불빛들이 흔들리고 있다. 잠을 자보려 했지만 멍한 머릿속은 수면을 거부했다. 졸아가며 허리를 두드리는 여정은 도시들을 흐려지는 어둠 속으로 밀어 보냈고 부산역에 도착했을 땐 날이 환히 밝아있었다. 곰탕이라도 먹을까 하다 부산역 앞에서 김밥을 두 줄 샀다. 깔깔한 입안이 무얼 먹어도 맛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부산역에서 27번 버스를 타고 45분이면 오륙도 스카이워크 정류장까지 갈 수 있다. 오륙도는 내가 찾아올 때면 늘 햇빛이 가득했다. 바다 건너 오륙도가 코 앞에 있는 듯 선명하다. 그래서 걷는 건지 모르겠다. 길에선 직접 보고 만지듯 확인할 수 있다.
1코스 출발지점에서 오륙도 스카이워크를 바라보면 깎아지른 바위 절벽에 있어 아찔해 보이는데 직접 걸어보면 그런 느낌이 덜하다. 750km가 넘는 장거리 탐방로인 해파랑길도 보기에는 엄청나 보이지만 실제 걷다 보면 어느샌가 종점에 이르게 된다. 무엇이든 떨어져서 겁만 먹는 것보다는 직접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장거리 길을 걸을 때는 구간을 나누어 목표를 정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해파랑길을 12개의 도시별로 구분하고 나누어 걸으면 걸어야 할 거리와 시간이 줄어들어 해 볼만 해진다. 그렇게 오륙도 스카이워크 전망대 앞에서 부산 구간의 해파랑길 1코스를 출발한다.
오륙도스카이워크.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주변이 달라보인다. 장거리인 해파랑길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직접 걸어 보는게 해결책이다.
이기대공원에서 바라본 이기대 자연마당과 멀리 보이는 오륙도
설레는 마음으로(오륙도 스카이워크-이기대자연마당-농바위-동생말-용호부두)
이제 시작이다. 오륙도 해파랑길 관광안내소를 지나 가파른 나무계단을 오른다. 계단 옆 바다로 향한 절벽에는 푸른 갓이 자라고 있다. 경작지로 쓰이던 이곳에 한동안 유채와 갓을 심어 경관을 조성했었는데 그때 주변으로 탈출한 것들이다. 그러고 보니 이게 유채인지 갓인지 구분이 아리송하다. 그냥 지나가면서 갓이려니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유채로 부르고 있다. 노란 꽃만으로는 두 식물을 구분할 수가 없다. 유채는 잎자루와 줄기가 만나는 부분을 잎이 감싸고 있어 감싼 잎이 없는 갓과 구분된다. 해파랑길 1코스는 이기대공원, 광안리해수욕장, 해운대해수욕장의 세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이기대공원은 바닷가 절벽의 산지로 과거에는 군이 경계하던 곳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어려웠지만 그 덕분에 해안숲이 잘 보전된 곳이다. 곰솔, 떡갈나무, 사람주나무 등 다양한 식물을 만날 수 있으며, 해안의 기암절벽이 만들어 내는 경관이 아름다운 지질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입구에 있는 이기대자연마당은 환경부의 복원사업을 통해 경작지가 자연공원으로 변한 곳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오륙도 일대의 바다가 훤히 보이는 경관 명당이기도 하다.
이기대자연마당을 지나면 좁은 산길과 절벽의 데크길이 교차하며 계속된다. 활엽수들은 모두 낙엽이 졌지만 곰솔과 함께 길의 곳곳에 자리 잡은 우묵사스레피나무, 동백나무, 돈나무, 송악, 보리장나무, 맥문동, 도깨비고비, 털머위 같은 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는 식물들이 숲을 밝히고 있다. 농바위가 보이는 쉼터에서 부산역 앞에서 산 김밥을 먹었다. 두 줄 중 한 줄은 이기대자연마당에서 이미 먹었다. 길을 걸을 때에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이 먹는 것이다. 도를 닦는 것도 아닌데 끼니를 거르고 다니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치마바위와 어울마당을 지나니 지금은 폐광이 된 구리광산과 해녀막사, 해식동굴이 나온다. 모두 부산지질공원에 속한 곳으로 바위 위에 파도가 이루어 놓은 돌개구멍 같은 지질자원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동생말에 이르니 잡힐 듯이 광안대교가 들어온다.
잘 가꾼 나무들(용호부두-도시가스오거리-삼익비치타운아파트-광안리해수욕장)
해파랑길 1코스를 걸을 때는 주로 용호부두의 횟집에 들러 제대로 된 식사를 한다. 물회와 매운탕을 함께 제공하는 이곳의 식당들은 어느 곳을 들어가든 만족한 식사를 할 수 있다. 시장이 찬이라고, 적당히 걷기까지 했으니 굳이 맛을 따질 필요도 없지만 말이다. 오늘은 김밥을 먹어 그런지 배가 고프지 않아 그냥 통과한다. 하늘을 찌르는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 앞을 지나는 길엔 노란 피라칸사스 열매와 분홍색의 개량종 동백, 먼나무 붉은 열매가 겨울을 잊은 듯하다. 광안대교가 시작되는 곳에 있는 분포교는 전어를 낚는 낚시꾼들이 북적대던 곳이었는데 아무도 없다. 현재 이곳의 다리 난간엔 화분을 놓아 아예 낚시를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낚시를 하며 도로 위로 낚싯줄과 물고기가 튀는걸 몇 번 보았는데 아마도 교통사고 위험 때문에 금지시켜 놓은 것 같다. 이제는 광안리 해수욕장에 있는 해양레포츠센터 오른쪽의 제방이 꾼들의 모임터가 되었다. 그들이 낚시를 그만 둘리는 없다. 남천항을 지나 삼익비치타운 아파트 옆을 지날 때는 제방과 단조로운 길이 이어진다. 봄이면 왕벚나무가 꽃의 축제를 여는 아파트 화단에는 동백나무의 흰꽃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인다. 사람들은 어디서고 또 다른 생명이 있어야 안심하는 본능이 있어 나무를 심고 숲을 만든다. 놀이터에 나와 앉은 노인들은 과거를 추억처럼 이야기 나눈다.
광안리해수욕장에는 새해맞이를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바닷가에 무리 지어 있다. 모두가 올 한 해의 소원을 떠올리며 기원하는 바닷가에서 나는 무엇을 바랄까. 길가에 설치된 백남준의 작품인 디지테이션(Digitation)을 만났다. 부산의 번영과 바다 빛 미술관의 발전을 기원하는 등대를 상징한다는 설명이 있다. 그러고 보니 백남준의 작품을 꽤나 많이 보았었다. 과천의 현대미술관뿐만이 아니라 짧게 근무했던 직장에 그의 작품이 여러 개 있어서 수시로 마주해야 했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고 주로 새로운 문명의 틈새에서 자라난 나무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용호부두 옆 피라칸사스와 동백나무 울타리와(좌) 흰꽃을 가득 달고 있는 동백나무. 처음에는 차나무가 아닌가 했다(우).
모래사장의 그늘막과 광안대교의 모습이 어우러진 광안리해수욕장
빌딩숲을 걸으며(광안리해수욕장-수영강하구-영화인의 거리- 동백섬-해운대해수욕장)
광안리해수욕장의 콩나물해장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민락 수변로를 걷는다. 작은 어선들이 모여 있는 민락항은 도로변에 쌓아놓은 통발들이 눈에 들어온다. 유명한 관광지일수록 먹고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볼 수 있을 때 감회가 더해진다. 민락 수변의 제방에는 2003년 태풍 '매미'가 옮긴 바위들이 놓여 있다. 태풍의 위협 속에서도 배를 타는 어부들의 생활이 더 실감 나게 다가온다. 수영만하구의 주변은 마린시티를 비롯해 초고층의 건물군들이 도시의 위용을 자랑하지만 강변의 테트라포드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눈에 밟힌다. 도시가 발달할수록 개인의 삶은 저 새처럼 더 작아지고 움추러 들겠지. 수영강하구를 건너는 곳이 조금 복잡한데 이런 곳을 걸으려니 조금씩 지쳐온다. "어쩐다. 해운대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는데 무언가 힘을 내야 하는데." 다행히 수영강을 건너며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먼나무가로수를 다시 만났다. 무언가 관심을 끄는 것이 있으면 길도 재미있어진다. 식물과 관련된 일을 해서 그런가 나는 식물만 보면 어느 곳에서고 신이 난다. 제버릇 개 못준다는 말이 이럴 때 적합한 걸까. 공원에 있는 굴거리나무, 오구나무, 광나무, 가시나무들을 쫒아가는데 발에 힘이 솟는다.
영화인의 거리를 걸으며 광안대교를 본다. 이곳에서는 야경을 볼 때가 좋다. 밤의 광안대교를 보고 근처에서 생맥주라도 한잔 한다면 그날 밤은 늦은 잠을 잘 수밖에 없다. 영화인의 거리가 끝나갈 무렵 운촌항 건너편으로 동백섬이 보인다. 동백섬은 운대산이라는 야트막한 산을 중심으로 동백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고 있다. "꽃피는 동백섬에~"로 시작되는 돌아와요 부산항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이 동백섬에 최치원이 쓴 '해운대(海雲臺) 각자와 최치원선생비와 동상이 있다는 것도 많이 알고 있을까. 동백섬을 돌아나갈 때쯤 바다에 앉아 있는 황옥공주 인어상을 만났다. 인어국인 미란다국에서 무궁국의 은혜왕에게 시집온 황옥공주라는데 지금의 인어상은 1974년도에 설치되었다가 태풍에 훼손된 것을 1989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해운대해수욕장에는 북극곰 축제 준비가 한창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코로나가 유행하기 전이니 사람들은 마스크도 없이 자유롭게 해변을 다녔다. 푸른 바다를 상징하는 작은 전구를 넓게 설치해 놓았는데 그 가운데 서있는 전등을 잔뜩 달고 있는 빛의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길에서 나무는 등대처럼 길 안내자가 되곤 한다. 그만그만한 나무들이 모여 있는 길에서 커다란 고목을 만난 듯 빛의 나무는 해파랑길 1코스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