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의 소나무는 육지로 기운다. 일에 치이고, 챙기지 못하는 건강과,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나의 삶을 나무처럼 기울게 한다. "아 그냥 다 놓고 어디든 가고 싶다." 이런 바람은 연말이면 더 강해지고, 보신각의 종이 울릴 때면 나는 방 한구석에서 짐을 싸고 있다. 해마다 첫날이 되면 친구들과 근교의 길을 걸었다. 3시간 정도 길을 걷고 난 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이 행사는 장거리 걷기의 팡파르였다. 웅크리고 지낸 일상은 짠지돌로 잠시 눌러 둔 김치처럼 언제 끓어넘칠지 모를 상황이었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해파랑길 걷기다. 770km의 장거리 탐방로인 해파랑길은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까지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길로 코리아 둘레길 중 제일 먼저 개통된 길이다. 우리의 바다는 동해, 남해, 서해가 각각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어 어느 바다를 찾던지 아쉽지 않지만 나는 동해바다를 가장 좋아한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기대 검은 바다 위에 떠있는 오징어배의 불빛을 바라보거나, 어둠 가득한 곰솔 숲을 걸을 때면 마른 갈증이 한꺼번에 해소되었다.
이 글은 2020년 1월 1일부터 2월 19일까지 집과 길을 오가며 22일간 걸었던 해파랑길에 대한 소소한 기록들이다. 해파랑길은 12개 도시를 지나는 50개의 코스로 되어 있다. 부산에서 출발해 울산, 경주, 포항, 영덕, 울진, 삼척, 동해, 강릉, 양양, 속초, 고성까지 이어지는데 모두 동해와 마주하고 있다. 각각의 도시는 조금씩 다른 자연을 품고 있는데, 사람들은 오랜 시간 지역의 자연에 적응해 살아가며 그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다. 자기만의 특징을 갖는 문화는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는 매력을 갖고 있다. 여행을 할 때 주로 아름다운 경관이나 지역의 대표 자원을 보는 행위에 무게를 둔다면, 걷기는 길을 통해 작고 사소하지만 감동이 있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만나는 데 집중한다.
해파랑길에서 만난 작은 어촌의 블록 담장에 그려진 소나무, 걷기에 지쳐 있을 때 기운을 주었던 그림이다
걷기 위한 준비
해파랑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꽤 여러 해 전이다. 지역별로 길을 조성할 때부터 인연이되어 대부분의 길을 걸었고 걷지 못한 길은 따로 시간을 내 걸었다. 하지만 순서가 엉킨 걷기여서 전구간을 차례로 걷겠다는 생각을 늘 하다 1코스부터 시작해 끝까지 걸은 것은 2017년이 처음이었고 2020년이 두 번째이다. 단거리의 길들은 그냥 걸어도 되지만 장거리 길은 걷는 나름의 목적과 지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끝까지 걷기가 힘들다. 2017년 걸을 때는 1월부터 3월까지 32일에 걸쳐 걸었는데 겨울철에 장거리 길을 걷는 것에 대한 체력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걷기 1년 전부터 한양도성길을 여러 차례 걸으며 길을 익혔다. 그다음엔 길이가 152km인 서울둘레길을 걸으며 장거리에 대한 적응과 체력을 키웠다. 또 길에서 만나는 다양한 풍경과 이야기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자료를 찾아보았다. 이번에 걷는 해파랑길은 두 번째이니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이다. 길마다 다른 다양한 경관이나 자원들 역시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어서, 누구에게 보여주거나 평가받는 걷기가 아닌 내가 만족하는 길을 걷고 싶었다. 그래서 몇 가지 스스로에 대한 걷기 지침을 만들었다.
내가 정한 지침
1. 길을 걷다가 힘이 들면 쉬어 간다. 코스별로 완주를 위해 무리하게 걷다 보면 발바닥이나 무릎에 꼭 탈이 나곤 했다.
2. 겨울철에 길을 걸어 춥긴 하겠지만 짐은 될 수 있는 한 가볍게 가져간다. 짐 때문에 걷기가 힘들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3. 옷은 두터운 옷보다는 얇은 옷을 여러 벌 입고 가 더우면 벗고 걷는 방식을 택했다. 두터운 옷은 들고 다니기도 힘들고 짐이 많아지는 첫 번째 원인이기도 하다.
4. 숙박은 가능한 한 좋은 곳에서 잔다. 잠자리에 대해서는 조금 깔끔을 떠는 편이다. 내가 걷고 싶어 걷는 길에선 편히 자는 게 가장 좋은 피로 회복 방법이다.
5. 노선을 따라 걷기는 하되 앱이나 지도를 통해 제공되는 트랙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해파랑 길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해파랑길 위에 설치된 안내시설 만으로도 걷기가 괜찮은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6. 걷다가 더 이상 걷지 못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할 경우 다음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 걷는 일은 하지 않는다. 어디든 저녁때 자거나 걷기를 멈춘 곳부터 다시 걷는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걷는 길이 아니다. 이번 해파랑길 걷기는 내가 그냥 만족하면 되는 걷기 여행이다.
7. 일정은 걷기가 싫어지면 마친다. 어차피 한번도 멈추지 않고 출발점인 부산에서 종점인 강원도 고성까지 걸을 형편은 되지 않는다. 걷다가 걷는 행위가 문득 싫어지거나 지칠 때가 있다. 보통 걷기 4일째 되면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데 이 순간을 극복하면 계속 걸을 수 있고, 만족감도 꽤 크지만 이번 걷기 여행은 완주가 목적이 아니다. 그냥 걷는 여행이다.
골목길을 걷다가도 모퉁이만 돌면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곳이 해파랑길이다
길에서 무얼 할까
길을 걸으며 지침을 모두 지키는 건 아니지만 지침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길을 걷는데 기준이 되는 큰 범주의 지침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세세한 기준을 세우고 길을 걷는다. 가령 걷다가 몸이 아프거나 안전에 위험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길이 끊기거나 잘못 들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나만의 기준을 세워 놓는다. 비나 눈이 너무 내리거나 식사를 먹을 곳이 마땅치 않을 때, 급한 연락이 올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길은 늘 생활하는 주공간이 아닌 잠시 머무는 낯선 곳이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행동하려면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예행연습과 대안을 마련해 놓을 필요가 있다.
이것 외에 한 가지 더 계획한 것이 있다. 나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것으로 길을 걷다가 만나는 서낭당이나 해신당 같은 당집은 가능한 들러 보기로 했다. 길을 걸을 때 자신만의 관심을 채워줄 수 있는 한 가지 주제를 정하고 그것을 확인하면서 걸으면 길이 더 알차 진다. 물론 친구나 모임 등 둘 이상이 걸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좋은 벗이 있는데 더 이상 무슨 공부가 필요하겠는가. 혼자 걷는 길이니 스스로를 위로하고 성취도를 높여주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 걷기는 다른 때보다 단기간에 걸었지만 걷기의 속도를 논한다면 나는 느리게 걷는 부류이다. 길을 걸으며 유유자적하는 정도가 아닌 거의 길을 훑으며 가는 정도이다. 그러나 늘 그렇게 걸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어떤 구간에서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걷겠지만, 또 어떤 길에서는 타조처럼 껑충거리기도 할 것이다. 왜냐고? 내 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