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원어민에 가까운 발음.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문법. 영어라는 언어는 한국인들에게는 완벽주의 콤플렉스를 준다. 완벽하지 않으면 영어가 아닌 것처럼.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알파벳을 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한 이후로 영어 완벽주의 콤플렉스를 쉽게 떨치지 못했다. 부모 잘 만나서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접했더라면 내 영어 발음도 원어민 수준이 될 가능성이 있었을 테지만 영어를 너무 늦게 접해서 한국식 억양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내 능력 부족이라 여기며 항상 나의 영어 발음에 자존심이 상하고 부끄러웠다. 내가 하는 영어에서 '한국'적인 요소를 전부다 제거하고 싶었다. 영어권 나라에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한국 토종인들이 완벽한 영어 발음을 구사하면 난 그들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질 뿐이었다.
미국에서 살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국에서 살면서 영어 말에 대한 집착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반 미국인들이 평소 하는 말에 '우와~ 발음 죽인다'하며 경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억양 짙은 영어를 너무도 뻔뻔하게 말하는 것을 매일 들으며 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어 발음에 고민할 여유가 없다. 영어로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체크카드를 분실했다. 일주일 동안 현금만 사용할 수 있었는데, 기존에 가지고 있던 현금도 10달러 미만이라 거의 강제로 허리를 조여매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새로운 체크카드를 우편으로 받았다. 하지만 카드 활성화가 안돼서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호주 사람에게 영어를 배운듯한 인도 사람과 10분에 걸쳐 이야기한 결과 결국엔 가까운 은행에 가서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인도식 영어 억양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그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게 쉽지는 않았다. 물론 영어 원어민의 말도 100프로 다 알아듣는 건 아니다. 하지만 원어민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때 느끼는 짜증과는 다른 차원의 느낌이었다. 아마도 영어 원어민 다운 발음을 구사하지 못하는 이 직원의 영어실력을 깔보는 나의 심보 때문인 것 같다. 한국형 영어 완벽주의 심리에서 벗어나려면 한참 멀었다.
미국 초중고등학교는 시간제 계약직으로 많은 TA(보조교사)를 뽑는다. 그들 대부분은 영어가 완벽하지 못한 이민자들이다. 내가 만난 TA는 몇 년 전 이집트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아줌마다. 이 분은 이집트에 살면서 프랑스어로 학교 수업을 배워서 아랍어,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어는 매우 서툴다. 프랑스 억양이 매우 짙고 기본 영어 문법을 무시한 채 단순한 단어 나열식으로 의사소통한다. 하지만 초등학생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데는 문제가 없다. 한 시간에 13달러 받는데 이는 맥도널드에서 받는 시급보다 더 적다고 한다. 물론 보조교사 경력이 쌓이면 한 시간에 20달러로 받을 수 있다. 한국 초중고에서 기본 시급을 주고 한국어가 아직은 서툰 이민자를 고용할 수 있을까? 아무도 미국 학교와 같이 이민자들을 고용하자는 의견을 내지 않을 것이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영어 발음이나 문법에 대한 완벽주의는 영어 때문에 생긴 게 아닌 것 같다. 우리 사회 문화 전반에 스며든 완벽주의가 영어공부 집착과 섞이면서 영어에 대한 완벽주의가 더 악화된 건 아닐까. 물론 완벽을 목표에 두고 노력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좋긴 하지만, 완벽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의 완벽하지 않은 실력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을 응원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물론 미국 사회에서 원어민에 가깝지 않은 영어 발음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제2언어도 아닌 한국의 상황에서 원어민 다운 영어 발음에 대한 완벽한 집착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이런 집착이 영어 울렁증이라는 병을 만들고 영어공부와 이별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오늘 내 영어가 원어민 답지 않아도 된다. 사실, 영어 원어민이라는 개념도 사라져야 한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 교육받고 자란 모든 사람의 영어가 다 똑같이 원어민 영어가 아니다. 영어라는 언어가 사용하는 입모양, 혀 위치, 호흡 등 영어식 발음을 하나씩 제대로 익혀나간다면 원어민식 발음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특히 강세와 음절을 영어식으로 제대로 발음하면 제대로 된 영어 발음이 나오는 게 쉬워진다. 내 영어 발음이 원어민에 가깝지 않다고 좌절하고 자신의 능력을 탓하기 전에, 내가 발음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영어식으로는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궁금해하고 알아가는 태도를 취해야 나의 영어 능력을 키워 갈 수 있다.
앞으로 영어 발음이 좋은 한국 사람을 만나면 그들의 영어 발음을 부러워하지 말고 영어 발음을 배우는 학습의 기회로 생각하고 공부해보자. 그들 입모양의 크기, 얼굴 표정, 제스처도 눈여겨보아라. 꿀벌은 너무 바빠서 슬퍼도 눈물 흘릴 겨를이 없다고 한다. 우리도 꿀벌처럼 공부해야 한다. 영어공부에 너무 바쁜 나머지 자신의 부족한 영어실력에 눈물 흘리는 여유가 없도록.